미조항에 가면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된다

남해섬 여행(1)-노도, 상주해수욕장, 미조항

등록 2004.08.25 19:36수정 2004.08.2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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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천사십오리 <신증동국여지승람>, 그러니까 서울에서 대략 400km정도 떨어진 머나먼 곳에 남해섬이 있다. 섬이라고는 하나 하동과 사천 쪽, 두 개의 연륙교로 이어지다 보니 육지로 여기기 쉽다.

그래도 제주, 거제, 진도, 강화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째로 큰 섬이다. 고려부터 조선 말까지 30명 정도가 유배되었으니 서울에서는 아득히 멀고 외진 곳이다.


보리암에서 내려본 남해바다. 섬 무리가 아름답다.
보리암에서 내려본 남해바다. 섬 무리가 아름답다.김정봉
천리(千里)면 남한 땅 어디든지 갈 수 있을 정도의 먼 거리이다. 김민기의 <천릿길>도 '천릿길이면 내 땅에서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그 땅을 내가 간다'는 의미로 붙인 제목이 아닌가 싶다.

남해 가는 길은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생겨 한결 쉬워지긴 했어도 천릿길 여행의 참 맛을 느끼려면 전주-남원-구례로 해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한창인 섬진강을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강물을 보고 또 본다. 수려한 지리산에 가려 그저 조용하게 유유히 흐른다. 깨끗하되 맑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삶의 체취가 배어 있어서인가? 그래서 이 강이 더 정이 간다.

섬진강.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
섬진강.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김정봉
진안에서 발원하여 쉼 없이 달려온 섬진강은 화개에서 한번 쉬었다 간다. 강물도 쉬고 나도 쉬어 본다.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 무렵에 화개에 도착하게 되는데 섬진강 강물을 보면서 참게매운탕이나 재첩국이라도 먹으면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돌아온 피곤함은 사라지고 즐거움이 가득해 진다.

남해의 지도를 보면 태아가 무릎을 굽힌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 보이는데 발에 해당하는 부분에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가 있고 그 밑에는 반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이, 그 동쪽으로 바다를 향해 마지막 힘을 쏟아 뻗어 있는 자리에 미조항이 있다. 전주-남원-구례-하동-남해로 이어지는 19번 국도는 이 곳 미조에서 끝난다.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는 남해섬에서 1km정도 떨어져 있다. 삿갓처럼 생겼다하여 삿갓 섬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이 섬에서 노가 많이 만들어진 다음부터 노도로 불리고 있다. 노도보다는 삿갓 섬이 왠지 정감이 더 간다.

해안도로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노도와 백련마을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유배에 처한 김만중을 더욱 서럽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백련마을과 노도. 섬이 삿갓처럼 생겼지요.
백련마을과 노도. 섬이 삿갓처럼 생겼지요.김정봉
육친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을 달래고자 온종일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만중을 마을 사람들은 신선놀음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바다와 마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과히 신선이 된 듯하다.

남해로 유배된 또 다른 학자인 김구는 화전별곡을 지어 남해의 아름다운 풍경과 따뜻한 인심을 널리 알렸다. 화전이 남해의 옛 이름이기도 하지만 귀양 가는 것을 꽃놀이 가는 것으로 비유해 화전(花田)이라 하였으니 이 근방의 경치를 보면 귀양 가는 것을 화전이라 할 만하다.

노도의 풍경에 취한 채 언덕을 넘으면 갑자기 넓은 터가 나오는데 이 곳이 금산 등산로 입구다. 눈을 들어 왼쪽을 보면 남해 금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큰 바위인 상사암을 중심으로 요암, 일월봉, 화엄봉, 농주암, 대장봉 등 웅장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쳐져 있다. 보리암은 상사암에서 오른쪽으로 다섯째 바위인 대장봉 밑에 있다.

남해 금산
남해 금산김정봉
이 바위들은 하늘과 맞닿아 신비롭게 보이기도 하고 우뚝 솟은 모양이 듬직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금산은 올라가서 보는 것이 제 맛이다. 멀리 남해바다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볼 때 금산의 참 맛이 드러난다.

상주해수욕장 원경
상주해수욕장 원경김정봉
남해섬 해안절경에 취한 기분이 금산을 보면서 한결 가라앉는 듯하였으나 이내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남해섬에서 제일 유명한 상주해수욕장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암에서 까마득히 보이던 상주의 풍경이 드러나는데 마치 거인이 두 팔을 벌려 바다를 껴안은 듯하다. 해수욕장이라기보다는 반달 모양의 거대한 풀장 같기도 하다.

상주해수욕장. 거대한 풀장처럼 아늑하다.
상주해수욕장. 거대한 풀장처럼 아늑하다.김정봉
상주해수욕장과 연이어 있는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3번 국도와 19번 국도가 갈리는 초전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3번 국도 종착점인 미조항에 닿는다. 언덕길을 타고 항구 쪽으로 내려가면 송정해수욕장과 연결되는 도로 밑에 팔랑마을이 있다. 여기서 보는 미조항의 전망이 제일 좋다.

미조항 정경
미조항 정경김정봉
방조제 끝에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그림처럼 다가오고 그 사이를 오가는 배가 바삐 움직인다. 주인을 기다리는 배, 출어하는 배,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멋진 풍경이다.

빨간 등대
빨간 등대김정봉
미조항은 MBC베스트극장 <떠나라 삐삐 롱스타킹>의 촬영 장소이다. '금화장'이라는 허름한 여관을 운영하며 철부지 누나와 병든 아버지를 부양해야 하는 수철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찾고 있는 이 곳 미조항을 떠나고 싶은 지긋지긋한 곳으로 여긴다.

금방 결혼하여 바닷가를 찾은 신혼부부, 방학을 맞이하여 놀러 온 여대생들,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들른 고등학생들, 금화장의 조그만 창틀로 내려다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수철 자신보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얀 등대
하얀 등대김정봉
카메라를 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미조항 거리를 헤매는 나도 또 다른 수철의 눈에 걸려들까 두려워 진다. 팔랑마을 정자에 쉬고 있는 할아버지의 눈이 매섭게 느껴지고 은빛 멸치를 나무상자에 담고 있는 일꾼들의 눈이 두렵다.

서울 생활에 절어 있는 불행한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봐주는 수철의 눈이 있을까 멸치를 담는 장면이며 멸치를 하역하는 장면을 서둘러 몰래 카메라에 담아 본다.

어수선하게 나뒹구는 멸치상자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빨갛게 토해내는 멸치의 핏물, 경차에 커다랗게 간판을 써 붙이고 다니는 남해다방차, 수철이 보고 싶어 하지 않은 이런 광경은 '불행한' 곳을 일탈하여 이 곳을 찾은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은빛 멸치, 그 옆을 흐르는 핏물, 열심히 일하는 어부의 모습에 게으름이 달아난다
은빛 멸치, 그 옆을 흐르는 핏물, 열심히 일하는 어부의 모습에 게으름이 달아난다김정봉
수철의 눈은 김만중을 보는 노도 주민의 눈이다. 수철의 눈에 비친 행복한 사람들도 일상에서 잠시 이탈하여 하루나 이틀 시간을 내어 잠시 쉬러 왔을 뿐 수철의 눈에 비친 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수철이 그렇게 가고 싶었던 서울에 오면 서울 사람들이 오히려 수철을 행복한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외로움에 지쳐 빈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는 김만중이 주민들의 눈에는 신선으로 보였듯이 말이다.

자신의 처지를 몰라주는 사람들에게 김만중은 자신의 처지를 변명이라도 하듯 "남들은 나를 신선으로 알겠구나"하고 시를 지어 남겼는데 나도 이 시 구절을 또 다른 수철에게 조용히 말하면서 미륵이 도운 (彌助)항구라고 하기보다는 아름다운 바닷물(美潮)항구라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미조항(彌助港)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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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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