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가 마누라라고 생각하세요!"

우리집 늦둥이 은빈이의 사랑이야기 (21)

등록 2004.08.30 11:03수정 2004.08.3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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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달리기를 하고 난 뒤 인터넷에 접속해 '묵상의 글'을 한 꼭지 올렸습니다. 파헬벨의 캐논을 들으며 잠시 묵상기도를 했습니다. 아랫녘에서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니 걱정입니다. 밖에서는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따뜻한 커피가 제격이지요.


아내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했지요. 그러자 아내는 밖에 나가서 마시자고 합니다. 요즘 우리 내외는 현관 잔디밭에 탁자와 의자를 갖다놓고 거기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고, 새소리도 듣습니다. 하루 중 그 시간이 가장 호젓한 시간입니다.

엄마 아빠! 커피 잡수세요.
엄마 아빠! 커피 잡수세요.박철
내가 아내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한다는 소리를 듣고 은빈이가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아빠! 내가 엄마, 아빠 커피 타 드릴게요."
"은빈아! 나는 마누라가 타 주는 커피가 마시고 싶은데."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아빠! 내가 마누라라고 생각하세요."

은빈이는 책을 읽다 말고, 잠옷차림으로 주방에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커피 잔을 꺼냅니다. 커피와 설탕을 찾아다 놓고 얼른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데 익숙한 솜씨입니다.

"은빈아! 아빠는 엄마랑 둘이서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 그런데 요즘 은빈이가 엄마 아빠가 대화를 나누는데 자꾸 끼어드는 것 같다."
"아빠! 내가 안 끼어들면 분위기가 안 날걸요."


은빈이는 나와 아내가 커피와 설탕을 얼만큼 넣는지 다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쟁반에 커피 잔을 담아 밖으로 들고 나오는데 아,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아내는 강화 시민연대에서 주관하는 자연생태교육을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어제 조류탐사를 하고 온 이야기를 아내가 재밌게 설명하고 있는데, 옆에서 은빈이는 아내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재잘거립니다.


아내와 은빈이는 내게 점수를 따야 할 일도 없는데 서로 지지 않으려는 듯이 목소리가 커집니다. 덩달아 새들도 찾아와서 재잘거리고 있습니다. 은빈이가 타 준 커피 맛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아빠! 내가 타준 커피 맛있지요.
아빠! 내가 타준 커피 맛있지요.박철
아내가 교동 12교회 연합으로 모이는 학생회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 외출을 하는 날입니다. 아내는 생태역사반 교사로 봉사하고 있지요.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아침밥을 먹지 않고 오전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에 점심밥을 먹습니다.

아내가 외출을 하면 전에는 큰 아들 아딧줄이 밥상을 차려주었는데 아딧줄이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난 후로는 내가 차려먹습니다. 오늘 아내가 외출준비를 하면서 말합니다.

"여보, 오늘 점심밥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데워 먹기만 하면 되는데, 당신이 차려 먹을래요?"
"그러지 뭐. 다녀와요."

그런데 이번에도 은빈이가 끼어들었습니다.
"엄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내가 아빠 점심밥 차려 드릴게요."
"네가 할 수 있겠어?"
"그럼요."

아내는 은빈이 대답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은빈이에게 밥상 차리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 방에 들어와 내일 설교 원고를 정리하고 있는데 은빈이 목소리가 또랑또랑 들립니다.

"아빠! 진지 잡수세요."

은빈이가 밥상을 어떻게 차렸을까 궁금하게 생각하며 거실로 나가 보았습니다. 은빈이가 밥상을 차려놓고 다 큰 처녀처럼 수줍게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와! 우리 은빈이 다 컸구나! 어떻게 밥상을 차렸냐?"

우리 은빈이가 처음으로 차려준 밥상.
우리 은빈이가 처음으로 차려준 밥상.박철
"엄마한테 다 배웠어요. 밥은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 동안 데우면 되고요, 찌개는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부글부글 끓을 때까지 데우면 돼요. 아빠는 뜨거운 걸 좋아하지요? 다른 반찬들을은 냉장고에서 꺼내 뚜껑만 열면 되고, 고등어 자반도 엄마가 프라이팬에 담아 놓은 거 살짝 데우기만 하면 돼요.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은빈이가 차려준 밥상을 놓고 식사 기도를 하는데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은빈이에게 처음 받아보는 밥상이었습니다. 아내가 만들어 놓은 걸 데워서 차려 놓는 것에 불과하지만 은빈이가 아빠를 위해서 자기 딴엔 정성을 다해 차려준 밥상입니다.

숟가락으로 밥과 찬을 떠서 입에 넣는데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 기분을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은빈이가 늦둥이로 태어난 대신 일찍 철이 든 것일까요? 오늘은 은빈이 때문에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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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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