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그리움을 가득 안고 핀 '제주상사화'

내게로 다가온 꽃들(77)

등록 2004.09.01 14:32수정 2004.09.0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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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손같아 보입니다.
'사랑하는 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손같아 보입니다.김민수
가을의 기운이 완연합니다. 계절마다 피는 꽃의 특성이 다른데 봄에 피는 꽃들은 노란색이나 분홍빛이 많습니다. 아마도 겨우내 바짝 말랐던 숲이나 들판에서 따스한 봄 햇살처럼 돋보이고 싶기도 하고, 오랜 겨울을 보내고 첫 선을 보이는 것이 못내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름에는 하얀 꽃들이 많습니다. 뜨거운 태양 빛을 다 받으면 너무 뜨거우니 조금이라도 덜 받아 그 뜨거운 여름을 잘 지내라는 창조주의 배려겠지요. 가을은 보랏빛이 많은데 이른 봄부터 얼마나 피고 싶어서 온 몸이 근질근질했겠습니까? 참고 또 참으니 인내, 고난의 빛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찬바람이 부는 가을을 고집하는 꽃들을 보노라면 다가올 고난의 계절 겨울을 예고하는 것만 같습니다.

제주의 들판 여기저기에 제주에만 있는 '제주상사화'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주로 소나 말을 키우는 방목지에 무성하게 피는데 아마도 가축들의 배설물이 그들에게 많은 영양분을 주는가 봅니다.

김민수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기다란 줄기만 쑥 내어놓고 꽃을 피우고, 이파리가 진후에야 꽃대가 나오고 꽃이 피니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서 잎과 꽃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상사병이란 약이 없는 무서운 불치병입니다.

상사화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구전되어 내려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런 내용입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시주를 하러 속세로 나왔다가 어여쁜 처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리게 되었단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출가한 몸이니 마음속으로만 그 사랑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 아가씨도 스님에게 한 눈에 반해 버린 거야.


'금지된 사랑'이 더 애틋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녀는 어찌어찌 스님이 계신 절을 알아내었고, 매일 절에 찾아가 사랑을 고백했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절 마당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단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스님이었지.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스님은 너무도 슬펐단다.

그 처녀가 쓰러져 죽은 그 자리에 이듬해 꽃이 피어났어. 상사병에 걸려 죽은 처녀의 넋이 담긴 꽃의 이름을 '상사화'라고 불러주었고 스님은 자기가 사랑하던 처녀의 혼이 담긴 꽃들을 절 주변 여기저기에 심었단다. 그래서 상사화가 절에 많은 것이란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꽃과 관련하여 구전되어 오는 창작된 이야기고, 절에 상사화가 많은 이유는 알뿌리의 방부효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경 같은 책을 엮는데 쓰는 접착제에 넣거나 탱화를 그릴 때 알뿌리의 즙을 섞으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게 해주기 때문에 항상 곁에 심어두고 이용했던 것이랍니다.

김민수
이해인 수녀의 '상사화'라는 애틋한 시가 있습니다.

아직 한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 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 여야 할까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김민수
상사화의 다른 이름 중에는 '과부꽃'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주로 섬이나 해안지방에서 그렇게 불리는데 이 꽃이 집안에 있으면 과부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꽃이 그리 달가운 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종달리의 집들을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았지만 상사화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액을 막기 위해 집안에 이 꽃이 피면 캐는 족족 뽑아 절 근처나 습지에 버리면서 '바다에 나간 우리 남편 무사히 돌아오게 하옵소서'하며 산신, 천신과 해신에게 빌고 또 빌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별히 절 근처는 특별한 의미가 있겠죠. 이런 속설을 따라가 보니 절 근처에 상사화가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김민수
가을에는 태풍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상상화처럼 길게 줄기를 내었다가는 바람에 부러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풀들이 우거진 곳에서 여름철보다 줄어든 곤충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면 옹기종기 모여 화사하게 기다란 줄기를 내고 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을꽃들이 여름 꽃보다 향기가 진한 이유도 곤충들이 희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겨울에 피어나는 수선화의 향기가 왜 그리고 진한지 알겠습니다.

피어나는 모습도 다 이유가 있고, 간직하고 있는 향기도, 색깔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저 뿌리, 이미 사라진 이파리들까지도 이유 없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저 들꽃들을 닮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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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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