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배어있는 남해의 독특한 풍경들

남해섬 여행(3)-방조어부림, 지족 죽방렴, 가천 다랭이마을

등록 2004.09.06 00:18수정 2004.09.1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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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환경을 극복하며, 때론 그 환경에 순응해 가며 살아온 남해 사람들. 척박한 땅과 모진 비바람에 절망도 했겠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극복해낸 삶이 배어 있는 남해의 독특한 풍경이 있다.

가천 다랑이논, 억척스럽게 가꾼 다랑이논은 남해사람들의 위대한 산물이며 얼굴이다
가천 다랑이논, 억척스럽게 가꾼 다랑이논은 남해사람들의 위대한 산물이며 얼굴이다김정봉
물건리 방조어부림, 지족리 죽방렴 그리고 가천의 다랑이논은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숨쉬고 동고동락한 삶의 뿌리요, 밑천이다. 모두 자연을 거역하지 않은 채 자연 있는 그대로에다 인공의 힘을 더해 만들어낸 위대한 인간의 산물이다.


물건리 방조어부림

조금 평평하다 싶으면 해수욕장이나 조그만 포구가 있고 그 근처에는 여지없이 마을이 들어서 있다. 심하게 비탈진 곳도 마다하지 않고 바위에 붙은 굴처럼 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다와 마을을 경계지으며 마을을 보호하는 마을 숲을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전형적인 남해섬 해안의 풍경이다.

우리는 마을이 만들어지면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기도 하고 나무나 숲을 정하여 마을의 신으로 모셨다.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은 남해에서 볼 수 있는 해안 숲 가운데 가장 크고 울창하며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마을 숲이다.

1.5km의 길이에 7000평의 넓이, 거기에 느티나무·팽나무·푸조나무·이팝나무·모감주나무 등 만여 그루의 나무가 빼곡이 들어차 있다.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곡선의 녹색 띠를 이루고 있다.

물건리 방조어부림 전경, 방풍과 방조,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신앙의 대상물이다
물건리 방조어부림 전경, 방풍과 방조,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신앙의 대상물이다김정봉
300여년 전에 바람과 파도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심었다고 하고 녹색을 좋아하는 고기떼를 부르기 위해 심었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녹색을 찾아 뛰어드는 물고기라. 상상만 하여도 신기하기만 하다.


요새는 마을 앞에 방파제가 생겨 녹색을 따라 찾아오는 '손님'은 없어지고 방파제가 숲이 하는 역할을 대신한다고는 하나, 아직도 이 숲은 고기잡이를 위한 작업장으로,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물건리 방조어부림 안, 숲 안에는 보기 드문 나무, 식물이 자라고 있어 생태보고이기도 하다
물건리 방조어부림 안, 숲 안에는 보기 드문 나무, 식물이 자라고 있어 생태보고이기도 하다김정봉
그보다 매년 10월에 이 숲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동제를 지낸다고 하니 이 숲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앙 대상물인 셈이다. 천연기념물 150호로 지정되어 강제적으로 보호를 하고 있지만 마을사람들의 정신 속에는 함부로 범할 수 없는 마을 지킴이로 자리잡고 있다.


독일마을, 물건리 해안을 바라다보기에 좋은 곳이다
독일마을, 물건리 해안을 바라다보기에 좋은 곳이다김정봉
이 숲을 한 눈에 보려면 마을 뒤, 언덕배기에 지금 한창 짓고 있는 독일마을에 서면 좋다. 독일마을은 60년대 간호사와 광부로 취업을 위해 독일로 갔다가 노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성된 마을인데 일부는 입주를 마쳤고 지금도 한창 조성 중이다. 물건리 마을과 독일마을은 서로 잘 어울리지 않지만 물건리 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곳이어서 한번 들를 만하다.

지족리 죽방렴

삼동면 지족마을과 창선면 지족리 사이의 지족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물깊이가 낮아 죽방렴이라는 독특한 고기잡이 방법이 발달해 왔다. 이렇다할 고깃배가 없어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한 선조의 지혜의 산물이다.

죽방렴은 바다에 V자 모양으로 말뚝을 박아 양 날개를 만들고 좁아지는 부분에 원통형의 대나무 발을 쳐놓아 만든다. 고기는 빠른 물살을 따라 말뚝을 피해 달아나다 대나무 통에 갇히게 된다. 날개는 길이 10m되는 참나무 300여 개를 촘촘히 박아 만들고 대나무 발은 원통의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든다. 대나무로 만드는 이유는 대나무의 표면이 매끄러워 고기의 비늘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죽방렴, 남해섬에서만 볼 수 있는 원시적인 고기잡이 도구
죽방렴, 남해섬에서만 볼 수 있는 원시적인 고기잡이 도구김정봉
남해 섬에서 언제부터 죽방렴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예종 원년(1496년)에 편찬된 <경상도 속찬 지리지> 남해현조에 의하면 "방전에서 석수어· 홍어· 문어가 산출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방전은 죽방렴을 가리키니 적어도 500년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5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법인 죽방렴은 이제는 남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으로 현재는 24통만 남아 있다. 주로 멸치가 잡히며 꽁치·갈치· 병어·보리새우·감성돔이 잡히는데 그물로 건져 올린 것보다 맛이 좋아 값을 더 쳐준다고 한다. 특히 육지 가까운 곳에서 잡히는 멸치는 바닷물의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육질이 부드럽고 그 빛깔이 은빛을 띤다고 한다.

지족해협은 일몰의 명소다. 이 날은 아쉽게도 멋있는 일몰을 볼 수 없었다
지족해협은 일몰의 명소다. 이 날은 아쉽게도 멋있는 일몰을 볼 수 없었다김정봉
창선교 아래 해안가 음식점에서 죽방렴으로 잡은 갈치회무침을 맛볼 수 있다. 창선교와 죽방렴이 있는 이 곳은 일몰의 명소이기도 한데 죽방렴과 창선교 그리고 멀리 장구섬이 그려내는 풍경이 일품이다.

가천 다랭이 마을

'남해똥배'라는 말이 있다. 화학비료가 나오기 전에 척박한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여수까지 배를 타고 인분을 갖고 온 데서 나온 말로 남해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억척스러움을 상징하는 말이다.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가파른 지형으로 배를 댈 수도 없고 배를 갖고 있지도 않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억척스럽게 산 삶의 산물이 다랑이 논이다. 그 논에 기대어 지금까지 버티어온 다랭이 마을사람들에게는 그런 남해똥배의 기질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설흘산이 뻗긴 뻗었는데 바다에 가로막혀 미처 평지를 이루지 못한 비탈진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산 지 400년. 다랭이 마을은 움푹 파인 곳에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인 듯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다. 예순 가구가 한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가천 다랭이마을 전경
가천 다랭이마을 전경김정봉
마을 사람들은 설흘산에서 내려오는 젖줄 같은 물줄기를 기반으로 비탈진 곳에 석축을 쌓아 100층이 넘는 계단식 논을 만들었다.설흘산에 등고선을 표시하기라도 하듯 조각조각 이어진 논은 층마다 곡선을 그려내고 있다. 남해 섬의 얼굴이 금산이라면 남해사람들의 얼굴은 다랑이 논이다.

논은 삿갓으로도 덮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삿갓 배미에서 300평이 넘는 큰 배미까지 있다. 9월에 벼를 추수하고 나면 그 자리에 10월에 마늘을 심어 그 이듬해 5월에 수확한다. 일년 내내 논도 쉬지 않고 사람도 쉬지 않는다. 더운 여름날에도 마늘을 손보느라 손길이 바쁘다.

가천 다랑이논
가천 다랑이논김정봉
이런 척박한 땅에서 이 마을 사람들은 무얼 믿고 살았겠는가.마을 바닷가 끝에 힘들고 지칠 때 힘이 돼준 암수바위가 서 있다. 이 암수바위를 이 마을사람들은 미륵불이라고 한다. 숫바위를 수미륵, 암바위를 암미륵이라 한다. 수미륵은 남성의 성기를 닮았고 암미륵은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미륵이 발견된 것은 분명치 않는데 영조 27년(1751년)이라고 전해진다.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牛馬)가 다녀 몸이 불편하니 꺼내어 세워주면 필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현령은 이 암수바위를 꺼내어 미륵불로 봉안하였다. 또 논 다섯 마지기를 이 바위에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수미륵과 암미륵
수미륵과 암미륵김정봉
어민들은 지금도 이 바위를 발견한 날인 음력 10월23일을 기해 이 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뱃길의 안전과 풍어를 빌고 있다. 이 바위는 원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선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기능이 바다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확대되어 미륵불로까지 격상된 것 같다. 지금도 이런 기능은 남아있어 아들을 기원하는 장소로도 남아있다.

이 외에도 매년 음력 10월 보름 저녁 8시경에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한 혼령에게 밥을 주어 풍작을 기원하는 동제를 마을 중앙과 동·서쪽 세 군데에 있는 밥무덤에서 지낸다.

제주는 한 달 전에 마을에서 가장 정갈한 사람으로 지정하는데 집안에 임신을 한 사람이 있어서도 안되고 잔칫집이나 상갓집 방문도 삼가고 집 대문에는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이 제주 집에 못 들어오도록 정성을 다한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마을 뒷산 깨끗한 곳에서 채취한 황토를 기존 밥무덤의 황토와 바꾸어 넣고 햇곡식과 과일 생선 등으로 정성을 다하여 상을 차려 풍농과 마을 안녕을 비는 제를 올리며 제사를 지낸 밥을 한지에 싸서 밥무덤에 묻어둔다.

학교 입구에서 내려다본 풍경
학교 입구에서 내려다본 풍경김정봉
마을길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폐교가 나온다. 텅 빈 운동장과 교실, 깨진 유리창, 물끄러미 앞만 바라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이 곳에서 보는 마을과 다랑이 논 풍경이 왠지 더 적막해 보인다. 가천 다랭이 마을이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점차 소득도 높아지고 있다고 하니 다시 학교에는 시간과 다투지 않는 가천마을 학생들로 가득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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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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