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깡을 먹을 때 "불효자는 웁니다"

이 가을 '사람 생각' ①

등록 2004.09.08 06:32수정 2004.09.0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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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친 생전의 불효는 기와에 새긴 무늬처럼 깊다.

선친 생전의 불효는 기와에 새긴 무늬처럼 깊다. ⓒ 김선영

나는 생맥주 안주로는 새우깡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짭짤함과 고소함이 시원한 맥주 맛과는 너무도 궁합이 잘 맞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뻥’ 하고 튀긴 강냉이를 기본안주로 내놓는 생맥주집들이 많아 새우깡을 생맥주 안주로 먹는 일이 드물게 되고 말았다.


담배를 덜 피우려고 간식용으로 새우깡을 사서 들어왔는데, 마침 냉장고에 맥주가 한 병 있어서 밤에 글 쓰다 말고 그걸 마시다 보니 새우깡을 처음 먹던 어릴 적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내가 새우깡을 맨처음 먹은 것은 초등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2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향이 춘천인 나는 1~2학년 때, 군데군데 묘지가 있고 뽕나무가 있고 송장메뚜기가 뛰어다니는 야산(野山)을 넘어 효제국민학교에 다니곤 했는데, 그때는 1주일에 한 번인가 당번이 양동이에 수북이 배급받아 오는 옥수수빵을 최고 간식으로 받아먹을 수 있었다.

아마 미군부대에서 준다고 했던가. 그 옥수수빵을 어디에서 무료로 배급해 주는 건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우리는 왜 미군부대에서 주는 거라고 단정을 지었을까. 어떤 아이건 그렇게 믿고 있었으며, 잘못 알고 있다고 손을 내젓는 아이도 없었다. 또 선생님께 질문하는 아이도 없었다.

아마도 미군 트럭이 지나갈 때 그들을 향해 ‘헬로!’ 하고 손을 흔들면 초콜릿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미군 말고 공짜로 먹을 것을 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옥수수빵 말고 또 다른 간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인 몰래 밭에서 뽑아 이로 껍데기를 까내고 베어 먹는 시원한 조선무였다. 무 특유의 구린내가 심하게 났지만 그것이 우리의 먹성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나는 아스팔트 도로변에 있는 춘천교육대학부속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이제 일부러 무덤이 있는 야산에 올라가지 않는 한은 하교길에 조선무를 뽑아먹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부자들만 다니는 학교라서 그런지, 아니라면 무료급식이 중단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학교에서는 옥수수빵을 한 번도 배급받아 먹은 기억이 없다.


연년생이지만 한 학년 위인 형과 더불어 내가 그 학교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두 분 모두 다니던 중학을 중퇴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들이 법대에 가기를 원했으며,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교육환경이 좋은 국민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생각하기를, 두 분이 왜 겨우 중학을 중퇴하였는가 싶었지만, 실은 그때의 중학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과정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니, 대학원 수료자가 많은 요즘의 교육 수준과 비교해 보면 그때의 중학교 중퇴가 지금의 대학교 중퇴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내가 춘천교육대학부속국민학교에 전학 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부잣집 아이들이면 왜 다들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나의 성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성적이 떨어진 만큼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더라도, 그때 나는 라면땅에서 새우깡까지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학교 교정에서는 이따금 예비군 훈련이 있곤 했는데, 아버지는 예비군 나이를 지나 있었더라도 작은아버지가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오곤 하였다. 마침 점심시간에 예비군 아저씨들의 휴식 시간이 맞아떨어지면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작은아버지의 멋있는 모습을 찾곤 했다.

겨우 발견하여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작은아버지는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하고 용돈을 쥐어주곤 하셨다. 나는 군것질을 엄금하는 아버지로부터 학교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 먹으라고 주는 용돈을 당연히 받은 기억이 없었으니, 그때의 작은아버지 모습이 얼마나 멋있고 귀중했던가.

나는 그렇게 받은 귀중한 돈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는 라면땅을 사 먹었으며, 국민학교 5학년 때는 전년도 12월에 처음 등장한 새우깡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때의 훌륭한 맛을 무슨 수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입맛이 고급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들의 입맛으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최상의 것이었다. 이제 우리나라가 참 좋아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새우깡을 맛볼 수 있도록 나에게 용돈을 쥐어주신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990년인 54세, 환갑을 못 넘기고 돌아가셔서 영정 앞에다 소주를 따라 드리고 실컷 울었었는데, 아버지가 칠순 연세이던 2001년 12월 30일에 그 동안 앓아 오신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그래서 2002년 1월 1일을 장지(葬地)에서 보냈다.

"나보다 먼저 죽으려고 그러느냐?"고 술에 잔뜩 절어 들어온 아들을 노여워하시던 선친…. 벌써 3년째 나는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살아오고 있다.

맥주 세 병에 마른오징어 한 마리를 1만9000원 주고는 마이크 잡고 무료로 노래도 할 수 있는 동네 라이브 주점에 어쩌다 갈 때면, 나는 새우깡을 곧잘 사갖고 들어간다. 그 새우깡을 안주로 먹으며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1940)를 이렇게 바꾸어 부른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아버님을/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고 통곡해도/다시 못 올 아버지여 불초한 이 자식은/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손발이 터지도록 피땀을 흘리시며/못 믿을 이 자식의 금의환향 바라시고/고생하신 아버님이 드디어 이 세상을/눈물로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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