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빈이는 3등만 세 번 했습니다"

가을 운동회, 전교생이 모두 삼색 깃발 아래 섰습니다

등록 2004.09.10 16:42수정 2004.09.1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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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은빈이가 간발의 차이로 3등으로 들어오고 있다.

은빈이가 간발의 차이로 3등으로 들어오고 있다. ⓒ 박철

오늘은 우리집 은빈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가을 운동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늦잠꾸러기 은빈이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은빈이가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이 32명밖에 안되는 작은 학교입니다. 20년 전 만해도 800여명이 모이던 학교가 8,90년대 급격한 이농 현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났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아내가 아침 밥상을 차리면서 은빈이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은빈아, 너 오늘도 달리기 꼴찌할 거니?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달리기를 못하니? 아무래도 아빠를 닮은 것 같은데?"
"엄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꼴찌라니요? 이래 봬도 3등이에요."
"몇 명이 뛰어서?"
"세 명이 달려서요."

"엄마는 어렸을 적에 달리기만 했다고 하면 꼭 일등을 했는데, 너는 왜 못 달리냐? 뱃속에 똥이 많이 들어서냐? 살이 너무 쪄서 그러냐? 아니면 머리가 무거워서 그러냐?"
"엄마, 아무래도 머리가 무거워서 그런 것 같아요."
"왜 머리가 무거운데?"
"생각을 많이 해서요."
"무슨 생각을 그리 많이 하는데?"

a 자랑스런 3등 도장. "쿡 눌러 주세요"

자랑스런 3등 도장. "쿡 눌러 주세요" ⓒ 박철

"먹는 생각, 노는 생각, 텔레비전 만화 볼 생각, 컴퓨터 게임할 생각, 새 자전거 탈 생각, 생각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까 달리기만 못 하는 게 아니고, 공부도 못 하는 게 아니냐."
"엄마, 1학년 때는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아내와 은빈이의 대화가 약간은 엇박자로 나가면서도 재밌어서 나는 가만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밥 대신 만둣국을 끓여 상 위에 내놓았습니다. 은빈이가 숟갈을 들고 만두를 건져 먹으며 큰 소리로 말합니다.


"엄마, 밥은 안 줘요?"
"야, 오늘이 운동회하는 날인데, 간단하게 먹고 가야 몸이 가벼워서 잘 달리지."
"엄마, 숙녀한테 무슨 말씀을 자꾸 그렇게 하세요."
"요즘 숙녀들은 밥을 많이 안 먹더라. 다이어트 하느라고."
"엄마, 그러면 저는 숙녀 안 하고 아줌마 할래요."

은빈이는 만두는 다 건져 먹고 국물에 밥 한 공기를 말아서 꾸역꾸역 먹습니다.


"엄마, 좀 전에 내가 달리기하면 3등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어느 때는 2등도 한 적이 있었어요."
"정말? 언제?"
"예진이가 학교에 치마 입고 슬리퍼 신고 오는 날에 내가 2등도 했어요."

a 우리 손주가 잘 달려야 할 텐데.

우리 손주가 잘 달려야 할 텐데. ⓒ 박철

은빈이는 밥 한 알 안 남기고 기어코 아침밥을 다 먹고는 엄마 아빠 학교에 일찍 오라는 말을 남기고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엘 갔습니다.

우리 내외도 서둘러서 은빈이 학교엘 갔습니다. 학교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너른 운동장에는 하얀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내외가 학부모 중에서 1등으로 도착을 했습니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학부모들은 보이지 않고 대신 수백마리가 넘는 잠자리들이 운동회 구경을 나왔는지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개회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스피커를 타고 운동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 학교는 적은 수의 어린이들이 모이지만 지금까지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선생님들과 함께 배운 것들을 마음껏 뽐내고 정정당당하게 보여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언니 오빠들은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오늘 운동회가 즐겁고 재밌는 운동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린이들과 학부모님들이 서로 한데 어우러져 한마당 잔치가 되도록 열심히 뛰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달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사진기를 들고 결승점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먼 발치 출발선에 서 있는 은빈이는 나를 보자 결연한 표정으로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간 긴장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출발 신호를 알리는 권총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a 줄다리기 청백전. “영차! 영차!”

줄다리기 청백전. “영차! 영차!” ⓒ 박철

"탕!"

은빈, 예진, 유림이 3총사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오는데 키가 제일 작은 예진이가 1등으로 들어오고, 그 다음은 예림이, 은빈이는 기대했던 대로 3등으로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3명이 뛰어서 3등을 했는데 은빈이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교생이 모두 3색 깃발 아래 서 있었습니다. 참 좋은 학교이지요. 모든 어린이들이 전부 3등 안에 들었으니 정말 좋은 학교가 아니겠습니까? 학생 수가 적어서 한 아이가 여러 종목에 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은빈이 팔뚝에는 3등 도장만 3개가 찍혔습니다. 1등이면 어떻고 3등이면 어떻습니까? 모든 어린이들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달릴 수 있다는 것만도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드디어 점심 시간 직전 꽃바구니 터트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이 서로 한데 어울려 힘껏 '오제미'를 던졌습니다.

바구니에서 즐거운 점심 시간을 알리는 오색 리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만치서 은빈이가 내게 달려와 3등 도장이 찍힌 팔뚝을 자랑스럽게 내보였습니다. 나는 참 잘 했다고 은빈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a 즐거운 점심 시간. 바구니가 터져야 점심밥을 먹을 수 있다.

즐거운 점심 시간. 바구니가 터져야 점심밥을 먹을 수 있다. ⓒ 박철

가을볕을 가리는 차일 속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의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풍성하고 흥겨운 정경이 이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가을 햇볕이 이렇게 좋은 걸 보니 올해는 대풍을 맞을 것 같습니다.

둥둥 북소리에 / 만국기가 오르면 /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 청군 이겨라 / 백군 이겨라 / 연신 터지는 / 출발 신호에 / 땅이 흔들린다 / …… / 온갖 산들이 모두 다 고개를 늘이면 / 바람은 어느 새 골목으로 왔다가 / 오색 테이프를 몰고 갔다. (이성교. 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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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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