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스케치북을 살펴 보셨나요?

[어린이 학습도구 문제 많다 2] 어린이용 스케치북

등록 2004.09.11 04:26수정 2004.09.1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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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게 스케치북을 사 줄 때 어떻게 사 주시나요? 대부분의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돈을 주고 사오게 하거나, 문구점에 가서 주인에게 “어린이 스케치북 주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또는 문구점에 어린이와 함께 가서 “네가 좋아하는 것 골라 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대부분 어린이들이 쓰고 있는 스케치북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a 로봇과 인형 그림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은 '어린이용' 스케치북의 겉 장 모습. 그러나 속 종이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로봇과 인형 그림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은 '어린이용' 스케치북의 겉 장 모습. 그러나 속 종이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이부영

남자 어린이 스케치북은 로봇이 그려진 것이고, 여자 어린이 스케치북은 공주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스케치북 뒷장에는 어김없이 ‘색칠하기’나, ‘가면 만들기’같은 ‘보너스’가 들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어른들은 그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 한 듯 만족해합니다.

a '어린이용' 스케치북 뒷 장 모습

'어린이용' 스케치북 뒷 장 모습 ⓒ 이부영

스케치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스케치북에서 가장 살펴보아야 할 곳은 화려하게 꾸며놓은 겉장이 절대 아닙니다. 스케치북에서 중요하게 살펴야 할 곳은 바로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릴 속 종이입니다.

그러나 어른이든 어린이든 스케치북을 살 때 겉모양만 살펴보지 속 종이를 꼼꼼히 보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린이들이 쓰고 있는 스케치북의 속 종이를 자세히 살펴 보세요. 아마도 종이 색이 거무튀튀하거나, 누리끼리 할 것이고, 종이 질은 까칠까칠 하거나, 얇은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a 그림이 없는 '어린이용' 스케치북. 그림만 없는 게 아니라, 품질표시도 만든 회사 이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속 종이 품질은 그림이 화려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림이 없는 '어린이용' 스케치북. 그림만 없는 게 아니라, 품질표시도 만든 회사 이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속 종이 품질은 그림이 화려한 것과 똑같습니다. ⓒ 이부영

그동안 모르셨겠지만, 지금 어린이들이 쓰고 있는 어린이 스케치북 속 종이는 한 마디로 그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종이입니다. 이런 종이에 붓으로 그림 물감을 칠하면 금세 불어 터지고, 몇 번 문지르면 때가 밀리듯 종이가 일어납니다.


힘을 주어 여러 번 칠하면 심지어 구멍이 나기도 합니다. 칠한 물감이 종이에 바로 스며들어 색깔도 칙칙해집니다. 물감이 다 마른 뒤에는 종이가 쭈글쭈글해 집니다. 제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이것은 또 어린이 물감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한데요. 어린이 물감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린이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은 어린이 스케치북 속 종이로 쓰이는 종이가 수채그림으로 적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스케치북을 살펴보면 속 종이가 100g/㎡에서 130g/㎡(‘g/㎡’은 종이 1㎡의 무게를 g으로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짜리가 대부분입니다. 가끔가다 품질표시에 150g/㎡이나 170g/㎡라고 표시한 것도 있지만 표시만 그럴 뿐 실제는 130g/㎡ 짜리입니다.

스케치북이 아니더라도 어린이들이 많이 쓰는 낱장으로 된 도화지도 모두 130g/㎡짜리입니다. 스케치북 만드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니, 이름없는 회사에서 재생 용지로 만드는 일도 많다고 합니다.

대신에 우리가 보통 중고등학생 스케치북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180g/㎡짜리를 쓰고 있고, 미술대학입시에서 쓰는 종이는 180g/㎡에서 220g/㎡짜리라고 합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작가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수채화 전문용지를 찾아 씁니다.

a 품질 표시는 되어 있지만, 제대로 된 것이 드뭅니다. 종이 단위를 ㎡/g라고 쓴 것도 있습니다.

품질 표시는 되어 있지만, 제대로 된 것이 드뭅니다. 종이 단위를 ㎡/g라고 쓴 것도 있습니다. ⓒ 이부영

한마디로 100g/㎡에서 130g/㎡짜리 종이는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종이가 아닙니다. 이 종이에 그림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스케치북을 만드는 사람도, 문구점 주인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종이에는 크레파스로 그린다 하더라도 종이 보푸라기가 일어나기 일쑤고, 크레파스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제 색을 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린이 스케치북 속 종이는 죄다 그림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는 100g/㎡에서 130g/㎡짜리로 통일해서 쓰는 것일까요? 어린이 스케치북과 도화지를 130g/㎡ 안팎으로 정한 기준은 무엇일까요? 언제부터 이런 종이를 쓰게 된 것일까요? 알아보니, ‘어린이용’ 도화지 규격을 정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어린이용’ 도화지를 규정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a 사진에는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부터 차례로 130g/㎡ 짜리 스케치북, 130g/㎡, 180g/㎡,200g/㎡, 220g/㎡ 짜리 도화지 모습입니다.

사진에는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부터 차례로 130g/㎡ 짜리 스케치북, 130g/㎡, 180g/㎡,200g/㎡, 220g/㎡ 짜리 도화지 모습입니다. ⓒ 이부영

‘어린이용’ 도화지가 이렇게 굳어진 첫 번째 까닭은, 어린이들에게 ‘잘 그려!’만 할 뿐, 어린이가 어떤 종이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면서 ‘어린이용’ 스케치북과 ‘어린이용’ 도화지는 원래 그러려니 해 왔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까닭은, 어린이의 표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가 표현한 것은 가치가 없는, 그래서 그린 다음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만다고 생각하고, 어린이들에게 값비싼 도화지를 주어서 무엇 하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세 번째 까닭은, ‘어린이용’ 스케치북이나 도화지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까닭은, 곳곳에서 어린이 미술교육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미술 표현 방법이나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어린이들이 쓰는 ‘어린이용’ 도화지에 대한 규격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감수성이 뛰어나 아주 적은 빛깔의 차이도 잘 구별해 냅니다. 그런데 품질이 나쁜 ‘어린이용’ 스케치북과 도화지로는 어린이들이 이런 차이를 나타낼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린이들이 하고 싶은 표현을 방해하고, 표현하려는 욕구를 없앨 뿐 아니라, 일찌감치 좌절을 경험하게 해서 표현에 점점 자신을 잃게 할 뿐입니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표현하기를 즐겨하는 어린이들에게, 확장된 미적 감수성을 점점 키워나가는 어린이들에게, 중고등학생보다도 미술대학입시생보다도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더 품질 좋은 도화지를 주어야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잘 그렸느냐 못 그렸느냐는 그 다음에 따질 일입니다. 도화지라고 해서 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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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독립한 프리랜서 초등교사. 일놀이공부연구소 대표, 경기마을교육공동체 일놀이공부꿈의학교장, 서울특별시교육청 시민감사관(학사), 교육연구자, 농부, 작가, 강사. 단독저서, '서울형혁신학교 이야기' 외 열세 권, 공저 '혁신학교, 한국 교육의 미래를 열다.'외 이십여 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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