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폼잡기'를 거부한 '촌놈'

먼저 떠난 윤중호형을 기리며

등록 2004.09.13 00:30수정 2004.09.1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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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집 옆댕이에 높게 솟은 둥구나무 이파리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이파리 사이로 쏟아지는 무더기 빛을 보다가 눈물을 찔끔거렸습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윤중호형이 부스스 떠올랐습니다. 형이 췌장암으로 쓰러지기 며칠 전, 형과 나는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둥구나무 사이로 무수하게 쏟아져 내리는 빛을 보며 죽음에 관한 얘기했습니다.


"성님, 저 빛깔이 참 곱지요…."
"너는 인마, 호화판으루 사는 겨, 저걸 서울에서 볼 수 있건냐…."
"죽는 건 그냥 죽으믄 되는 디, 죽음을 앞두면 저런 거 때문에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 거 같쥬?"
"그려, 그렇지이…."

형은 오랜 친구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평소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낙심해 있었습니다. 형이 대전 상가 집을 다녀오던 그 날, 서울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형의 절친한 친구인 공주 토박이 조성일형과 함께 공주 금강 다리 밑에서 장맛비로 벌겋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앞에 두고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그 날 밤 우리 집에서 묵기로 했는데 작은 아이 인상이가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었습니다.

"거봐라, 인상이가 기달리고 있잖어, 아이스크림 사오자니께."

평소 같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녀석인데, 형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내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형과 인상이는 잘 통했습니다. 일 년에 서너 차례 만나는 것이 전부였지만 형과 인상이는 전생에서 만난 인연처럼 스스럼없이 잘 통했습니다. 잘 통한 것이 뭐 별거 있겠습니까? 그냥 서로가 얘기하는 것을 귀담아 들어주고 재미있게 웃어가며 마음 써 주는 것이 전부였지요.

인상이가 다섯 살 될 무렵 중호형은 인상이에게 '영감'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별 반감 없이 받아드렸고 '나보고 영감이라고 하는 아저씨'라며 인상이 역시 중호형을 ‘좋아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가출해 입산 경력이 있는 중호형과는 큰스님과 동자승처럼 아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이 날도 형은 아홉 살 먹은 인상이 녀석을 무릎에 앉혀 놓고 확인하듯 물어보았고 녀석은 늘 그랬듯이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인상아, 너 낸중에 가출하믄 큰 아빠 찾아 와야 혀."
"예."


a 아이들을 좋아했던 형이 직접 발행했던 청소년 잡지 <세상의 꿈>

아이들을 좋아했던 형이 직접 발행했던 청소년 잡지 <세상의 꿈> ⓒ 송성영

운영하던 기획 사무실 일이 한창 잘 나갈 때 <세상의 꿈>이라는 청소년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던 중호형은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했습니다(형은 80년대 초, 안면도에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야학과 같은 '누동학원'에서 중학교에 진학 못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처럼 약삭빠른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느려빠진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 날 형이 자정이 넘어 우리 집에 온 것은 나보다는, 별 대화 없이도 잘 통했던 인상이를 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 날 밤 공교롭게도 인상이가 형을 마지막으로 만났으니까요(아직 인상이에게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중호형이 인상이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큰아들 두레의 성격과 많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레가 우리 집에 오면 두 녀석은 개울가에서 모래장난 같은 별 재미도 없어 보이는 놀이로 종일토록 붙어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렇게 두 녀석은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느려 빠지거나 엉뚱하게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a 형의 큰 아들 지각대장 두레 얘기가 실린 산문집 <지각대장 쌍코피 터지던 날>(온누리)

형의 큰 아들 지각대장 두레 얘기가 실린 산문집 <지각대장 쌍코피 터지던 날>(온누리) ⓒ 송성영

초등학교 다닐 때 지각하는 날이 더 많았다는 두레, 학교에 가다가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뭔가에 몰두하다가 지각하고, 보따리를 이고 가는 낯선 할머니를 만나 목적지까지 짐을 들어 주다가 지각한다는 아주 착한 녀석입니다(두레에 대한 얘기는 형의 산문집 '지각대장 쌍 코피 터지던 날'<온누리>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중호형이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열흘이 돼 가고 있습니다. 나는 그 날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맥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꾸역꾸역 밥벌이 준비에 김장 무와 배추를 갈아놓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지만 딱히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저 만치에 있었습니다. 나는 내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마룻바닥에 멍하니 앉아, 그런 '나'를 바라보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중호형과의 인연의 끈이 징그럽게도 질긴가 봅니다. 형을 떠나보낼 때 이미 눈물 다 쏟아놓았는데도 형이 세상을 떠난 열흘 내내, 형과 관련된 뭔가를 보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뭉클거리며 솟아올랐습니다.

어쩌다 사랑방 구석에서 잘 익어 가는 오디술이며 솔방울술, 죽순술 단지와 마주칠라치면 형의 모습이 부스스 떠오릅니다. 금방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와 '한 잔 하자' 그럴 것 같습니다. 형이 좋아했던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와 마주 앉아 있을 때도 형의 눈빛이 아른거렸습니다. 심지어는 지붕을 타고 오르는 호박을 볼 때도 형이 떠오릅니다. 형은 나처럼 썰어 말린 애호박 꼬지를 무척이나 좋아 했으니까요.

그렇게 내내 형과 함께 했던 추억 속을 헤매고 다니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간에 먼저 형에 대해 뭔가를 풀어놓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내게 형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헤헤 새끼, 지랄하구 자빠졌네."

공연히 심각하게 폼 잡고 사는 인간들을 질색했던 중호형, 하지만 이번만큼은 심각해져 볼까 합니다. 형과 함께 해온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볼까 합니다.

형과 만난 10여 년의 세월, 생각해 보면 형과의 만남은 그리 오랜 세월도 아니었고 횟수로 쳐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어쩌다 서울에 올라가면 별 사연도 없이 형을 만났고, 형 또한 일 년에 서너 차례, 별 볼일 없이 공주에 내려와 혼자서 혹은 가족들과 함께 하루 이틀 우리 집에 머물다 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차례 정도 전화통화를 한 것이 전부였는데 형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생각해 보면 형은 참으로 '징그러운 인간'이었습니다. 내가 장가가기 전이었습니다. 계룡산 기슭 다 쓰러져 가는 빈집에 주저앉아 청승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형과 함께 충남 서산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10년 세월이 넘었습니다. 전교조 앞장서다가 해직 당한 중호형 친구인 전인순형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신문 만들어 보겠다고 진땀깨나 흘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신문 잘 되게 도와주겠다고 서산에 갔다가 중호 형에게 붙들려 4박5일을 더 눌러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문에 관련된 일을 다 마치고 버스 터미널에서 형은 서울로 나는 계룡산으로, 제 갈 길로 돌아가던 날이었습니다.

"저기 가서 딱 한 잔만 하구 가자, 그냥 가는 게 섭섭하잖어."

형이 턱을 한 곳에는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좌판을 놓고 앉아 곤 계란에 막걸리 잔술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과 함께 서산 터미널 한 켠에 주저앉아 할머니가 살아온 세월을 안주 삼아 막걸리 잔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가기가 좀 그렇지? 버스 시간도 있으니께, 한 잔만 혀."
"그러쥬, 뭐."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할머니의 전 날 못 다한 이야기에, 우리 옆댕이에 앉아 잔술을 비우는 아저씨들의 얘기까지 다 들어가며 형의 '딱 한 잔만'이라는 꼬임에 넘어가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을 보냈습니다. 당시 서산 버스 터미널 앞에 전교조 사무실이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를 숙소로 눌러 앉아 4박 5일을 보냈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중호형과는 남들이 말하는 근사한 술집을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근사한 술집이라고는 서울 합정동에서 생맥주 집을 운영하는 형의 친구 술집에 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대부분 선술집이었습니다. 언젠가 형과 함께 강원도 정선 아리랑을 취재하러 갔다가 선술집에서 육자배기로 눌러앉아 막차를 놓친 적도 있었습니다.

한때 넝마주의(재건대)사람들과 다리 밑 생활을 하기도 했다는 중호형, 그때 왕따 당하던 나이 많은 거지에게서 배웠다는 각설이 타령, 어쩌다 부르는 형의 각설이 타령은 신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은 낮은 사람들의 세상을 몸으로 부딪치며 그 질긴 생명력과 희망을 시로 노래했습니다.

a 낮은 사람들의 세상을 몸으로 부딪히며 노래한 시집<청산을 부른다>(실천문학사)

낮은 사람들의 세상을 몸으로 부딪히며 노래한 시집<청산을 부른다>(실천문학사) ⓒ 송성영

-슬그머니 저자거리에 내려와
서러운 곱사등, 조막손으로 눈을 가리고, 훔치듯 해바라기하며
차부 한켠에서 눈곱을 떼고 있어도
靑山은 靑山이다. 추운 세상 고개 돌리다가 언뜻 보았던
아! 그때 그 사람이었을까?
스스로 세상의 넝마가 되어
무료급식소 식판 그득히
따순 온기를 담던 사람, 세상의 쓰레기가 되어, 저물녘에
어둑어둑, 다리 절면서 스스로
깜깜한 밤이 되던 사람
다시, 靑山을 부른다.ㅡ

시집<靑山을 부른다>(실천문학사)에서

형이 앓았던 췌장암 말기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경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은 별 고통 없이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형의 모습은 빼빼 말라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눈빛으로, 달마대사 그림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두 눈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던 세상 사람들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몸은 접어두고 남들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습니다.

"지리산 갔다 온 일은 잘 됐냐? 살만한 디가 있는 겨?"
"둘러보니께, 지리산도 많이 망가졌데유, 헤헤, 얼마 전에 저 앞니 뽑았슈."
"알어."
"헤, 어떻게?"
"오마이에서 봤지."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기 전까지, 중호 형이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내 글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 알았습니다. 내가 <오마이뉴스>에 올린 연재 글을 묶어 책을 낼 때 군 말없이 서문을 써줬던 형이었지만 그동안 내 글을 꼬박꼬박 읽고 있다는 얘기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촌놈이다.
촌놈은 촌에서 살아야 되는데 나는 서울에서 산다.
서울에서 살면서도 삐까뻔쩍하게 광도 안난다.
'에그! 촌놈' 소리를 들으며 산다.
그렇다고 고향에 가면
고향친구끼리 아주 잘 어울려지는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말들은 안하지만 ,내 몸 구석 어딘가에
빤지름한 도시의 물때가 묻어 있는 것처럼
나는 참 한심하게 살고 있다.
서울에선 촌놈이고
촌에 가면 도시 놈이 되는 그런 삶은 참 재수 없는 삶이다.
내가 시의 형식을 빌려 끄적거린 글도 꼭 같다.
나는 날릴 깃발도 없다.
깃발 그림자에서 깃발을 쳐다볼 뿐이다.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상상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지도 않는다.ㅡ

형의 첫 시집 <본동에 내리는 비>(문학과 지성) 서문에서

문학 판에서 '똥폼잡기'를 거부한 형은 영락없는 '촌놈'이었습니다. 부스스한 머리채, 듬성듬성 난 턱 수염에 색 바랜 바바리 코드, 낡은 가방 하나 달랑 둘러메고 쓰러질 듯 술을 퍼마셨지만 언제나 꼿꼿하게 일어서는 뚝심 좋은 촌놈이었습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살았지만 정 많은 '촌놈'으로 살았습니다. 주변 사람들 가족사를 꿰뚫고 있었던 속정 많은 '촌놈'이었습니다.

형은 주변 사람들의 가족사를 속속들이 꿰차고 있었습니다. 형하고의 대화를 통해 나는 형의 친구들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형의 친구들의 성격까지 알게 될 정도였습니다.

형의 얘기를 듣다보면 친구뿐만 아니라 친구의 아내 이름까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형은 자신의 아내, '홍경화' 뿐만 아니라 친구들 아내의 이름을 정확히 호명해 가며 얘기합니다. 형과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덕분에 나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 대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애정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형은 '싸가지가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기획 일을 하다보면 문학은 물론이고 정치판 사람들까지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글재주는 뛰어난데 생활이 개판인 인간들, 상대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아무리 유명한 인간이라 하여도, '싸가지 없는 사회적 인물'쪼가리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던 고집불통이기도 했습니다.

느리지만 제 목소리로 진실 되게 살아가는 사람들, 형이 애정을 갖고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형은 이들을 '뒷골목 사부'라 불렀습니다.

형이 만났던 뒷골목 사부들' 중에는 강홍규, 이문구, 신경림, 천상병, 김종철, 윤구병, 김성동, 송기원, 윤재철 등등, 유명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한철이 아저씨'를 비롯해 이덕재, 김원영, 황진화, 최효숙, 이기술, 안천식, 등등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뒷골목 사부들의 얘기는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문학동네>에 실려 있습니다).

a 형이 살아오면서 만났던 '뒷골목 사부들'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문학동네)

형이 살아오면서 만났던 '뒷골목 사부들'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문학동네) ⓒ 송성영

-나는 참 운이 좋다.
또래 친구들처럼 무난하게 살지 못하고
사연 많고 가슴 저리고 아프게
목을 외로 꼬고 떠돌며 살았지만
그렇게 아플 때마다
운 좋게도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정규학교 선생님들이나
책에서 만날 수 있었던
여러 스승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맥없이 떠돌다 만난
나의 '뒷골목 사부님들'은
또 얼마나 많으신가
나는 그분들에게
우리 모두가 안쓰럽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중생이라는 걸 진즉 배웠다.-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의 '책을 펴내며'에서

나는 마루에 앉아 형과 함께 바라보았던 둥구나무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빛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형이 살아있었다면 나는 이 빛을 이렇게 오래도록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형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형과 함께 했던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내일도 있을 빛을 통해서 형을 봅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저 빛 무더기를 통해 형과 함께 했던 기분 좋은 시간들을 떠올립니다. 형은 빛과 함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형처럼 각진 세상에 정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 문득 저 빛싸래기는 그들이 남기고간 정, 혹은 사랑의 흔적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 빛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빛싸래기에 눈을 박아놓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솔직히 저 빛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형은 말유, 저 빛 어딘가에 있겠쥬? 있으믄 좋쿠, 없으면? 그냥 있을 거라고 생각할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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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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