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강도가 문화적 우상으로 뜨는 이유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12] 아이오와주 애데어

등록 2004.09.13 12:49수정 2004.09.1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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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 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필자 주>


지난 번 글에서 법과 질서에 갈수록 엄격해지는 미국의 단면을 소개했는데 그것에 비쳐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제시 제임스(Jesse James, 1847-1882)다. 서부 시대를 풍미한 무법자다. 30여명을 살해했다고 떠벌리고 다녔고 은행과 열차를 가리지 않고 털었다. 한번은 그가 은행에서 6만 달러를 털기도 했는데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13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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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스트를 다니다 보면 이정표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Jesse James Birthplace(출생지)', 'Jesse James Farm(농장)', 'Jesse James Home(집)', 'Jesse James Bank Museum(제시 제임스가 턴 은행 박물관)' 등 방방곡곡에 제시 제임스가 출몰한다. 제시 제임스 박물관이라는 이름도 두 개나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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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 무장 강도 제시 제임스. ⓒ 자료사진

한 쪽에서는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가두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법을 안 지킨 정도가 아니라 파리 잡듯 사람들을 죽인 잔인한 살인범을 경쟁적으로 모신다.

다른 일로 아이오와 주에 있는 소도시 애데어(Adair)를 가게 됐는데 이곳에서 매년 7월21일 즈음에 제시 제임스 기념 축제가 벌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올해에는 7월 23, 24일 이틀 동안 제시 제임스 축제가 걸판지게 벌어졌다고 한다. 행사 중에는 '남녀 리틀 제시 제임스 선발대회'와 '제시 제임스배 어린이 올림픽 대회'도 있다. 기차와 제시 제임스라는 이름의 승용차가 등장하는 기념 퍼레이드도 펼쳐졌다.

그 중에서 '리틀 제시 제임스 선발대회'가 궁금했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삥을 뜯는' 아이를 리틀 제시 제임스로 뽑아야 강도 제임스를 기리는 취지에 맞을 테고 그것도 빨리 뜯는 아이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줘야 할 텐데…(삥은 일본 속어로 남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뜻함. 어원은 포루투갈어인 pinta에서 나왔다고 함.)

이 마을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 존 애데어 장군(General John Adair)으로서는 (미국식 표현으로 하면) 무덤 안에서 돌아누울 일이다. 모두 장군인 자신은 외면하고 강도인 제시 제임스만 기린다. 왜 그럴까. 기념행진에 등장하는 기차가 단서다.

“제임스가 의적이라도 됐었는가?”
“그건 아니다. 그는 사람을 죽인 나쁜 사람이다.”
“그럼 왜 그를 기념해 축제를 벌이는가.”
“나도 모르겠다. 그저 역사의 한 부분을 기념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곳에 있는 유일한 신문 <애데어 뉴스(Adair News)>의 발행인 윌리엄 리터 3세(William Litter Ⅲ)와 나눈 대화 한 토막이다.

애데어 축제의 주제는 그의 말대로 ‘우리 유산 끌어안기(Embracing Our Heritage)’다. 무장강도의 역사까지 끌어안는 것을 보면 대단한 포용력이다. 애데어가 제임스를 자랑스러워 하는 이유도 그가 범죄의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기록을 애데어에 남겨줬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 열차 강도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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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데어에 있는 세계 최초의 달리는 열차 강도 현장 기념비. 비문에는 겸손하게 '서부에서 일어난 첫 열차강도'라고 적혀 있는데 주민들은 세계 최초라고 믿고 있다. ⓒ 홍은택

애데어는 세계 최초로 달리는 열차가 털린 ‘역사적’ 현장이다. 달리는 열차를 세우고 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는 달리는 열차보다 더 빠른 자동차도 나오기 전이다. 창조적이면서 대담한 범행이었다. 다음은 그 사건의 개요다.

1873년 제시 제임스 일당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Omaha)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7만5000달러의 금괴를 싣고 디모인(Des Moines)으로 향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첩보를 확인하기 위해 제시 제임스의 형인 프랭크 제임스(Frank James)와 콜 영거(Cole Younger)는 오마하까지 가서 열차의 구체적인 출발시각과 애데어 통과시각을 알아냈다.

애데어를 범행 현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근처에 인가가 없고 고지이며 길이 구부러져서 열차가 서행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수법은 치밀했다. 먼저 두 줄기 선로를 5미터 가량 양쪽으로 자르고 북쪽 선로의 끝에 끈을 매달았다. 그 끈은 남쪽 선로 밑을 통과해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로 이어졌다. 이 구덩이에 대기하고 있던 제임스 일당은 이 끈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해가 채 저물지 않았던 오후 8시, 오마하를 출발한 기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열차 기관사는 선로가 그 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절단돼 있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열차가 다가오자 구덩이 속에 있던 제임스 일당은 힘차게 끈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잘라놓은 선로가 이탈하면서 기차는 탈선해 둑에 처박혔다. 모두 4량이었는데 기관차와 화물차 한 량은 옆으로 넘어져 기관사가 즉사하고 화부는 부상을 입어 나중에 사망했다. 다행히 승객을 태운 객차들은 넘어지지 않았다. 제임스 일당은 바로 총을 쏘면서 기차에 접근, 차장을 위협해 금고를 열도록 했다.

당시의 지역신문인 <데일리 아이오와 스테이트 레지스터(Daily Iowa State Register)>는 “흠잡을 데 없이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진 훌륭한 작전 수행이었다”면서 “한가지 흠이라면 전보의 통신선로를 끊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흠은 딴 데 있었다. 금고를 열자 찬란하게 빛나는 금괴는 간데없고 불과 1700달러만 들어있었다. 7만5천 달러의 금괴를 실은 열차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강도들의 정보 수집력 한계였다.

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몇날며칠을 준비하고 도상연습한 뒤 잠복해서(철로를 절단한다는 게 쉬운 일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돌진했는데 꿈에 그리던 금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7명의 무장강도들은 체면도 없이 갑자기 좀도둑으로 바뀐다. 승객들을 협박해서 몇 달러씩 코 묻은 돈을 털었다. 모두 3000달러. 그것을 7명이 나눠야 한다. 그들은 15분만에 작전을 끝낸 뒤 근처에 매달아 놓은 말을 타고 남쪽으로 떠났다. 말 위에서 그들이 나눴을 ‘이거 인건비도 안 나오는구먼’ 이라는 푸념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중국은 정말 인구가 많다. 어딜 가든 중국 사람이 없는 데가 없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그들의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데일리 아이오와 스테이트 레지스터>에 따르면 승객들 중에는 30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상류 출신의 이 학생들은 미국의 동북부인 뉴 잉글랜드(New England)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와 동서 횡단 열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그들은 혼돈의 와중에서 내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제임스 일당에게 여비를 보태줬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사건이 수습되고 새벽 1시에야 인근 마을에 들어간 그들은 ‘미국은 지옥 같은 나라(Hell country)’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시 제임스 추모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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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제임스가 살던 농장에 있는 박물관. ⓒ 홍은택

서두에 썼듯이 무장 강도 제임스를 기념하는 곳은 애데어만이 아니다. 미주리 주 컨비(Kearney)에 있는 제임스의 생가는 40에이커의 넓은 농장에 원형 그대로 복원돼 있다. 아이오와 주 코리돈(Corydon)에 있는 프레어리 트레일 박물관(Prairie Trail Museum)은 1871년 6월 3일 그가 턴 은행의 금고를 그대로 보관,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6월 3일이면 제임스 일당의 은행 무장강도 사건을 재연하는 축제를 벌인다. 미주리 주 세인트 조셉(St. Josep)에서는 그가 살다가 비운의 총격을 받은 집을 박물관 옆에 보존하고 있다. 1873년 문제의 애데어에서 제임스 일당에게 털린 피해자 록 아일랜드(Rock Island) 철도회사까지도 1954년 이 사건을 놀이로 재연하면서 추모열기에 가담했다.

“왜 그렇게 제임스를 기리는가.”
“글쎄. 그가 가난한 사람들한테 돈을 나눠줬다는 얘기도 있고….”

아이오와 주 라모니(Lamoni) 관광안내센터에서 일하는 비닝(Binning) 할아버지(81)도 정확히 그 이유를 대지 못한다. 나중에 자료들을 뒤져보니 그가 로빈 훗과 같은 존재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한테 더 물어봤는데 왜 제임스를 추앙하는지 딱 부러지게 말을 못한다.

제임스에 대한 추앙은 근대와 함께 건국한 미국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미국인들은 고대로부터 전래돼오는 전승과 전설이 없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제임스는 19세기 중엽 우는 아이도 울음을 딱 멈추게 할 만큼 공포와 상상력을 자극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이 없어도 강도를 숭배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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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제임스를 다룬 영화 중 고전으로 꼽히는 '제시 제임스'(1939년)의 포스터. ⓒ 자료사진

더구나 제시 제임스는 아예 문화적 우상이기도 하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1921년 <무법자 제시 제임스(Jesse James as the Outlaw)>라는 제목으로 처음 나온 뒤 2001년 <미국의 무법자들(American Outlaws)>에 이르기까지 한두 편도 아니고 무려 38편이나 나왔다. 제임스만큼 많이 영화화된 인물도 드물 것이다.

영화 제목도 다종다양하다. <프랭크와 제시 제임스의 모험(The Adventures of Frank and Jesse James)>(1948년)에서부터 <위대한 미주리 습격(The Great Missouri Raid)>(1951년), <제시 제임스의 진짜 이야기(The True Story of Jesse James)>(1957년), <프랭크와 제시 제임스의 마지막 나들(The Last Days of Frank and Jesse James)>(1986년) ‘<브롱코 : 제시 제임스의 그늘(Bronco: The Shadow of Jesse James)>에 이르기까지 제목만 봐도 제시 제임스를 좋아하게 될 것같다.

제임스에 대한 열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소니사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용으로 '총잡이:제시 제임스의 전설(Gunfighter: The Legend of Jesse James)'이라는 게임 소프트웨어를 시판했다. 새로운 영화도 또 만들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브래드 피트(Brad Pitt)가 주연이다. 제목은 <제시 제임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2006년 1월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단순히 전승과 전래 문화의 공백을 메워주는 존재로서만 제임스를 바라보기 힘들다. 우리의 '위대한' 인물 제임스는 누구인가. 그는 왜 무장강도가 됐을까.

인생의 전환점, 남북전쟁

제임스는 1847년 침례교 목사 로버트 제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광산 노동자들을 전도한다는 이유를 대고 금을 캐러 갔다가 거기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의사인 류벤 새뮤얼(Reuben Samuel)과 세번째 결혼을 한 뒤 제임스 형제와 함께 미주리 주 컨비에서 살았다. 자상한 의붓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낸 제시 제임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남북전쟁 때였다.

미주리 주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바라는 남부군에 속했고 이웃 캔자스 주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군에 속했다. 양쪽 주는 치열한 그리고 잔인한 전투를 벌이며 들판을 피로 물들였다. 그 때 전투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면 어떤 전쟁의 비극보다 더 끔찍하다. 마을을 불태우는 것은 물론이고 대량학살하고 시체에서 머리가죽을 벗겨내 말에 묶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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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제임스를 다룬 또다른 영화 포스터. ⓒ 자료사진

어린 제임스가 북부군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된 계기는 북부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의붓아버지 새뮤얼을 나무에 매달고 제임스 자신도 붙잡아 등을 마디가 있는 가죽끈으로 채찍질한 사건이었다. 당시 북부군이 남부 게릴라 부대를 이끌던 윌리엄 콴트릴(William C. Quantrill)의 행방을 취조했다는 설도 있고 게릴라 부대에 가담한 형 프랭크 제임스의 행방을 물었다는 설도 있다. 취조 과정에서 의붓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그 때 어머니인 제럴다(Zerelda)도 남편과 함께 투옥됐다는 설도 있다. 제시 제임스도 잠시 투옥됐다는 설도 있는데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 진위를 가릴 수는 없다.

어느 자료에서나 분명한 것은 제시 제임스가 남부군에 속했고 콴트릴 게릴라 부대에 합류했다가 남북 전쟁 후 부대가 흩어지자 갱을 조직해 은행, 열차, 마차 가리지 않고 강도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당시 철도와 은행의 성격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도는 신생국가 미국이 지리적 국가통합을 이루는 물리적 수단이었고 은행은 국가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시키는 첨병이었다.

철도를 건설하면서 일부 농민들이 농토를 강제로 수용 당했고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뒤 남부군을 지지했던 농민들은 연방정부의 달러를 사기 위해 금과 은 등을 은행에 싸게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제임스가 연방정부와 북부 자본가의 상징인 철도와 은행을 혼내주니 속이 후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는 돌연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그는 사촌 누이동생과 결혼해 세인트 조셉에서 신분을 위장한 채 살고 있었다.

미주리 주지사는 죽이든 산 채 붙잡아오든 그를 잡아오면 1만 달러를 주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 은행을 털기 위해 봅(Bob)과 찰스(Charles) 포드(Ford) 형제를 갱에 끌어들였다. 그런데 포드 형제가 머리를 굴려보니 은행을 터는 것보다 제임스를 터는 게 더 쉽고 위험부담도 적어 보였다. 1882년 4월 3일 제임스는 집 안에서 벽에 걸린 그림을 바로잡기 위해 의자를 딛고 서 있었다. 때마침 도착한 봅 포드는 단 한발을 쐈다. 이 총알은 제임스의 뒷통수를 관통했고 그는 즉사했다.

남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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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제임스가 어릴 적 살던 집. ⓒ 자료사진

10대 때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이 무장강도는 35세에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묘비에 적힌 비문은 강렬하다.

'이름을 여기에 적을 가치가 없는 겁쟁이와 배신자에 의해 살해된, 헌신적인 남편과 아버지인 제시 우드슨 제임스(Jesse Woodson James)를 추념하며'

배신자에게 살해됐더라도 강도였던 그의 장례식에는 2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는 남부군 지지자들의 영웅이었다.

포드 형제의 말로도 비참하다. 1만 달러를 받기는커녕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가 주지사의 특사로 풀려난 뒤 찰스 포드는 자살했고 봅 포드는 10년 뒤 술집에서 싸우다 총으로 살해됐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창작의 자유가 맘껏 '남용'되고 있다. 그에 관한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1939년 <제시 제임스>에서는 탐욕스런 철도회사의 간부가 어머니를 살해했기 때문에 그가 무장강도가 됐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영화에서 복수의 임무를 완수한 뒤 조용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갔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영화에서는 강도를 모의하다 공범에게 살해 당한 무장강도가 아니다.

영화학자 수잔 헤이워드(Susan Hayword)의 '영화사전'에 따르면 미국의 건국신화인 서부 영화는 두 종류가 있다. 이른바 제시 제임스와 같은 '위대한 강도'들이 주인공인 영화들은 서부를 근대 국가로 포섭시킨 주력(철도나 은행)에 응징을 가함으로써 거대한 지배자들에 대항하는 개인을 부각시킨다. 그 반대편에는 무법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고 개척자 정신으로 국가를 설립해가는 국가주의적인 서부영화들이 있는데 보안관이나 제 7기병대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임스가 전자를 대변하고 있다면 후자를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 영화배우 존 웨인(John Wayne)이다. '영원한 보안관' 존 웨인의 생가도 아이오와 주에 있다.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의 소재가 된 매디슨 카운티의 윈터세트(Winterset)라는 곳에 있다.

박물관으로 보존되고 있는 이 생가에도 몇 년 전에 가봤는데 제임스의 농장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서 지금 비교해보면 누가 강도였고 누가 '보안관'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다(물론 존 웨인은 영화 속에서만 보안관이었다).

존 웨인은 진짜 '서부'에서는 대접을 받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말을 타고 있는 그의 육중한 동상이 세워져 있고 역시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의 존 웨인 공항에는 존 웨인 동상이 서 있다.

그러나 과거 남부군에 속했던 주에서는 제시 제임스가 존 웨인을 능가한다. 그는 단지 거대한 국가 권력과 자본에 저항한 서민들의 영웅이 아니라 남부군의 전사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제임스는 계속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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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제임스 농장의 문패. 마치 지금도 살고 있는 듯하다. ⓒ 홍은택

오죽했으면 사람들은 제임스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놓고 도주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맞아. 제시 제임스라면 능히 그럴 사람이야"하면서 소문이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1948년에도 오클라호마 주에서 그를 봤다고 그럴 듯하게 말했다.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제임스를 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통해 불멸의 삶을 살고 있다. 영화에서 그는 남북 전쟁과 같은 정치색은 탈색되고 거대한 권력에 도전하는 개인주의적 영웅, 서부 활극 시대의 낭만적 영웅으로 부활했다. 영화는 동시에 노예제의 존속을 바란 남부군의 가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실제로 제임스가 '부활'하기도 했는데 프랭크 돌턴(Frank Dalton)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제시 제임스라고 주장했다. 현상수배를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놓고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로 피신해 있었다면서 그 전에 떠돌던 설과 유사한 알리바이까지 들이댔다. 누가 인정해주든 말든 그는 1951년에 사망할 때까지 제임스로 남은 인생을 살았다. 그가 제임스가 맞다면 제임스는 104세까지 생존했던 셈이 된다.

사망에 얽힌 의혹이 끊이지 않자 그가 사망한 지 113년 뒤인 1995년, 유족들은 관에서 시체를 꺼냈다. 대단한 유족들이다. 그리고 DNA 테스트를 법의학자인 제임스 스타스(James Starrs) 조지 워싱턴대 교수에게 의뢰했다. 테스트 결과 그 시체가 제임스의 것일 가능성이 99.7%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것으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으면 될 것을, 보다 확실히 끝내겠다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텍사스 주 그랜베리(Granbury) 공동묘지에 묻혀있는 돌턴의 시체를 꺼낸 게 화근이었다. 2000년 이 시체는 DNA의 테스트까지 갈 것도 없이 돌턴의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시체의 한쪽 팔이 없었다. 생전의 돌턴은 두 팔이 모두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체를 꺼낸 것. 물론 제임스의 시체도 아니었다. 묘비가 잘못 박혀 있었던 것이다. 돌턴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묘연해졌다.

돌턴이 제임스라는 설은 그랜베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시체들을 하나씩 꺼내서 DNA 테스트를 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사라지기 어렵게 됐다. 미주리 주 스탠튼(Stanton)에 가면 제임스가 1882년에 사망하지 않았다는 증거만 모아놓은 또 다른 제시 제임스 박물관까지 있다.

제임스는 죽어서도 포위망을 피해 다닌다. 남북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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