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노래 부르며 '젊음' 찾는 사람들

‘못 말리는’ 인천의 배호 마니아 모임 동행 취재

등록 2004.09.14 04:29수정 2004.09.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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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열성회원인 이종철 화백이 그린 대형 배호 초상화

열성회원인 이종철 화백이 그린 대형 배호 초상화 ⓒ 김선영

1960년대 말에 최고 인기를 끌었던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가사를 보면 삼각지에서 헤어진 남녀의 슬픈 사랑 노래처럼 느껴진다. 남자 쪽에서 불러도 그렇고 여자 쪽에서 불러도 그렇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1절)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 하며/ 눈물 젖어 불러 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2절)’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지난 후에도 계속돼온 어지러운 나라 상황을 떠올려 보면 ‘사랑’이 상징하는 대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단지 연인과 부부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도 ‘사랑’이요 자식도 ‘사랑’이요, 친구도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민주(民主)’도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중년들이 그토록 많은 것이 아닐까.

a 이종철 화백이 자신이 그린 배호 초상화를 바라보며 열창하고 있다

이종철 화백이 자신이 그린 배호 초상화를 바라보며 열창하고 있다 ⓒ 김선영

그렇듯 민족의 애환을 호소력 있게 노래한 29세 요절(1971년) 가수 배호가 가장 처음 밟은 조국의 고장은 인천이다. 1946년 미 해병 사령부의 상륙정(LST)를 타고 아버지 배국민 독립운동가를 따라 인천 땅을 밟았던 것이다.

미8군 무대에서 노래한 것도 배호와 인천과의 빼놓을 수 없는 인연. 그런 인천에서도 마침내 배호 팬클럽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금요일(9월 10일)은 '두메산골 노래비 건립' '마지막 잎새 노래비 건립' '파도 노래비 건립' '강릉 배호 파도 가요제' 등 배호 부활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이하 배기모)'의 인천 부평지회 발족 후 첫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오후 7시 30분경, 젊거나 어려서부터 배호 노래에 푹 빠져든 3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까지의 20여 회원들이, 정기모임 장소인 부평의 한 호프집을 찾았다. 이곳은 생맥주를 마시며 따로 돈을 내지 않고 마음껏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


회원 중에는 유통업체 사장도 있고 도매서점 사장도 있다. 막걸리집 사장도 있고 공인중개사도 있다. 해군 원사도 있고 경찰관도 있다. 직업은 갖가지지만 배호를 그리는 마음은 모두가 하나.

a 여성 회원들 "배호 노래라면 언제나 듣기 좋아요"

여성 회원들 "배호 노래라면 언제나 듣기 좋아요" ⓒ 김선영

고인에 대한 묵념 등 정식행사를 마치고 나면 당연히 이어지는 것이 배호 노래자랑이다. 라이브 카페에서 라이브 가수로 활약하며 이 모임 홍보국장을 맡고있는 김청운씨가 이날 사회다.


회원 모두가 배호 노래라면 한 가락 하는 사람들이니, 모두가 자기 특색으로 배호의 노래를 불러댄다. 다른 사람이 부른 노래는 되도록 피하다 보니 노래방기기로 부를 수 있는 40여 곡이 다 나온다.

이 모임에 가장 열성적인 회원으로 초대 부평지회장이던 이종철(60) 화백을 빼놓을 수 없다.

배호 노래를 녹음할 수 있는 시설까지 갖추어 놓은 호(虎)화실에서 밤새워 그린 좌우 2m가 넘는 배호 초상화를 들고 나와 모임 장소에 걸어놓았으니 분위기가 그야말로 배호 전용 노래 카페다.

20대인 1960년대에 부평극장 간판 그림(신성일씨 등의 인물화)을 그리는 등 평생 그림만 그려온 그는 노래 예약 도우미 역할을 손수 맡으며 즐거워한다. 배호 노래라면 곡명만 대도 노래반주기의 번호를 모두 외울 정도.

a 여성회원들의 노래 솜씨 또한 만만치 않다.

여성회원들의 노래 솜씨 또한 만만치 않다. ⓒ 김선영

합기도 고수인 이헌씨는 부천지회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부평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배호 마니아 중의 마니아. 배호 노래라면 가사를 따로 보지 않고도 못 부르는 것이 없을 정도.

배기모 부평지회장 김종구씨를 비롯한 ‘배호 노래가 없으면 못 사는’ 인천의 중장년 배호 팬들은 배호 노래를 부르며 그렇게 ‘젊음’을 찾고 있었다.

그들 세대에서는 그 노래가 20대의 노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은 오늘도 배호의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가 하루빨리 노래반주기에 삽입되어 마음껏 부를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물론 배호 모임이라고 해서 배호 노래만 부르는 것은 아니다. 배호 노래를 좋아하지만 잘 부르기가 쉽지 않은 30대 여성 회원들은 ‘요즘 젊은이들’ 노래도 부른다. 그 노래들이 적절하게 배합되니 분위기가 오히려 살아난다.

어느덧 시내버스 막차가 움직일 시각. 배기모 부평지회 회원들은 11월 정기모임을 배호 33주기 기념식(양주시 장흥 신세계공원 묘원)에 참여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배호 초상화’와 작별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배기모 전국모임, 17일 서울 캘리포니아호텔서 열려
회원가수 정법현씨, 포항에서 배호 노래로 장애인 위문공연 참여

이달 17일에는 서울 송파구 캘리포니아호텔 연회장에서 배기모 전국모임(문의:서울 02-3141-1107)이 열린다.

20일에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포항 문화예술회관 대강당에서 배기모 경북지부장인 가수 정법현씨가 인기가수 송대관, 조항조, 현숙씨와 함께 장애인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참여하여 배호 노래 2곡을 부를 예정이다. 입장료는 무료.

정씨는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바쁜 시간 속에서도 경주 나사렛마을 위문공연을 자청하여 외롭게 살아가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위하여 단독공연을 한 일이 있다.

/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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