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장산성오창석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욱 죽 흘러내리는 7월 말. 진도대교를 넘어 선 순간부터 다시 그 땅을 빠져 나오기까지, 칙칙한 대기는 몸뚱어리를 휘감고 도무지 놓아주질 않았다. 떠나기 전 들었던 진도아리랑의 흥겨움도 귓전을 떠나버리고 없었다.
끈적끈적하고 묵직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한여름의 땡볕이 눈을 쪼아대고, 물을 연신 들이켜도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가는 곳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면 깡마른 하늘만 있었다. 환청일 뿐이었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나는 진도를 죽음으로 만나고 있었다.
진도는 곳곳이 삼별초 대몽항쟁의 유적지이다. 그러나 패전으로 기록된 삼별초 항쟁의 역사는 어이할 수 없는 죽음의 기록이기도 하다. 강화도에서 30여년을 버틴 무인정권의 주력은 삼별초였다. 원래의 삼별초는 도둑이 들끓자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최씨 무인정권이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창설했다.
'고려사'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조아(爪牙)로 삼아 그들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간혹 사적인 은혜를 베풀며 또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무인들의 사병조직인 '도방'과 구별되는 관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신들과 깊이 유착되어 사병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최우의 집권시기에 강화도로 천도한 무인정권은 본토를 침략하는 몽고군에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보호가 더 우선했기 때문에 6차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본토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런 몽고 침략군에 실질적으로 대항했던 이들은 자신의 땅을 떠나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백성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