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느릿느릿 걷는다고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등록 2004.09.15 12:34수정 2004.09.1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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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에서 살 때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나미 시나미"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이라고 한다. 가끔 텃밭에 나가서 김을 매면서 어떻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김을 맬 수 있을까 궁리를 한다.


a 이른 아침.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보니 아침밥을 짓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걸 보니 아침밥을 짓는 모양이다. ⓒ 박철

쪼그려 앉아서 하지 않고 서서 편안하게 김을 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후딱 해치울 수 있을까? 그러다 힘들면 슬슬 농땡이 부릴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내는 입을 꾹 다물고 호미질을 한다. 아내는 강원도 정선에서 배운 시나미 시나미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느릿느릿 걷는다고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장자에 기심기사(機心機事)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기계를)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부자도 바지를 벗을 때는 한 다리씩 빼는 법"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한 번에 한 입을 베어 먹고, 한 번에 한 노래를 듣고, 한 번에 한 신문을 읽고, 한 번에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a 빨간 단풍 잎이 길가에 뒹글고 있다.

빨간 단풍 잎이 길가에 뒹글고 있다. ⓒ 박철

삶은 단순할수록 좋다. 자연의 리듬은 단순하다. 새 울음소리를 들어보라. 바람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러나 자연의 소리는 일정한 리듬에 의하여 조화를 이룬다. 자연은 결코 서두는 법이 없다.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두기까지 자연은 순리(順理)에 의하여 조용히 움직인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가를 우리 모두는 안다. 다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 단순한 진실을 잊고 사는 것뿐이다. 지금 당장 숨넘어갈 듯 달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게 되리라는 생각 자체가 바쁜 현대 생활이 세뇌시킨 강박관념일 뿐이다.

잠시만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내면을 응시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우리의 삶 속에 '쉼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쉬는 것조차도 하나의 일이다. 휴식을 위한 스케줄을 억지로라도 따로 빼어놓지 않으면 '쉼표' 하나 표기 할 자리가 없을 만큼 꽉 들어차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쉰다는 것은 숨을 고르는 일이다. 달리거나 노래할 때에도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당장 울화통이 치밀더라도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면 보다 차분하게 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그것을 빠르게 내 쏟아버리면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그때마다 주문을 외우자. 천천히, 여유 있게, 느리게, 그것은 행복에 이르는 주문이다. 천천히, 여유 있게, 느리게….

a 석류가 익어 가고 있다.

석류가 익어 가고 있다. ⓒ 박철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장석주.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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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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