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118

놀이는 끝나고

등록 2004.09.16 17:20수정 2004.09.1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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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고참 격인 포교가 한숨을 쉬며 내뱉는 말에 백위길은 전에 없이 벌컥 화를 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포교가 되었나! 나 같이 얼떨결에 포교가 되기라도 한겐가? 다 필요없네!”


백위길은 휙 돌아서 가 버렸고 포교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이었다.

“다 때려 부숴라!”

시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질서를 지키던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뜯겨져 나가는 창고와,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곡식을 보자 변하기 시작해 ‘체면 차리면 손해라는 마음으로 서로 한 톨의 쌀알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툼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옴 땡추 박충준은 충혈 된 눈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전 키 작은 사내인 사승(四僧) 장응인이 죽임을 당했고 콧수염 땡추 칠승(七僧)김계호는 포도청으로 잡혀갔다는 보고를 들은 터였다. 그의 곁에는 허여멀쑥한 사내와 똥싸게 땡추가 침통한 표정으로 시전의 난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형님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이 난리를 잡으려 곧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외다. 그 틈을 노린다면….”


허여멀쑥한 사내의 말에 옴 땡추는 손을 번쩍 들어 더 이상의 말을 막았다.

“어리석은 소리! 어설프게 그런 식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조정이라면 내가 무엇 하러 이런 일까지 꾸미었겠나? 우리에게 아직 천시(天時)가 오지 않았음이야.”


“형님, 저기를 보십시오.”

똥싸게 땡추가 가리키는 곳에는 백위길이 열심히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아니되오! 어서 가져간 곡식을 돌려놓고 진정들 하시오!”

사람들의 반응은 아예 백위길을 무시하거나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비켜! 이 썩어빠진 포졸 나부랭이 같으니라고!”

“우리 애가 굶어 죽게 되었는데 댁 같으면 어쩌시겠소!”

백위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난동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백위길의 설득이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단상에 올라 사람들에게 소리쳤던 김광헌, 고억철, 홍진길 등이 백위길을 도와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옴 땡추는 피식 웃음을 날리며 허여멀쑥한 사내와 똥싸게 땡추에게 소리쳤다.

“너희들 오래전에 우리 팔 형제가 모여서 굿 놀이를 한 기억이 나느냐?”

“물론이죠 형님!”

허여멀쑥한 사내와 똥싸게 땡추는 그때 일을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여기서 한번 굿판을 벌여 보자꾸나!”

“아니 형님, 사람들은 난동을 부리는데다가 술도 없고 하다못해 쉰 떡도 없는 이곳에서 난데없이 무슨 굿 놀이 입니까?”

똥싸게 땡추는 더럭 소리를 질렀다.

“eP끼 이놈! 노는데 무슨 이유가 있느냐! 놀라 보면 흥에 취할 터인데 무슨 술이 필요한고?”

똥싸게 땡추는 배에 힘을 주며 단숨에 토해내듯 소리쳤다.

“쉬-이! 물렀거라! 쉬-이!”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람들은 더러 옴 땡추 쪽을 쳐다보았고, 곧 그들은 해괴한 춤동작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며 세 명이 원을 만들며 천천히 돌았다.

“쇠머리 돼지 대가리는 고사하고 뿌연 막걸리 한 잔 없으니 정성이 부족하구나! 이제 우리 대감이 한 번 놀고 가는데- 높은 산에 눈 날리듯 얕은 산에 재 날리듯 억수 장마 비 퍼붓듯 대천 바다에 물밀 듯이 이 좌석에 오신 손님 재수나 소망을 섬겨드리리다,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아”

세 명이 목청껏 지르는 소리에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고 어느덧 잦아드는 사람들의 고함소리를 대신하는 굿 노래 소리에 백위길도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궁금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어떤 대감이 내 대감이냐, 어떤 대감이 내 대감이냐, 어사를 돌던 내 대감이요, 순력을 돌던 내 대감이라, 날이 새면 어수를 돌고 밤이 되면 순력을 돌아 어사 돌던 내 대감이요, 순력을 돌던 내 대감이요, 얼시구 절시구 지화자 좋아 아니 놀지는 못하겠네. 일생에 좋은 건 덩기덩이구 평생에 좋은 건 늴리리요, 오늘같이 좋은 날은 세상을 뒤집어도 없구나.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아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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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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