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더스
나는 감 선수가 사회인 야구대회에서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았다고 해서 그가 정말 프로야구에서도 최고의 투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벤치를 따뜻하게 데우는데 일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야구가 좋았고, 야구장에 가고 싶었고, 야구복을 입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로진백을 만진 후, 구두를 신은 채로 야구공을 던질 때, 그의 꿈도 함께 내 마음을 향해 날아왔다. 그가 얼마나 야구선수로 살고 싶어하는지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기고 지는 걸로 세상은 마치 야구경기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 떠들어대지만 조금만 더 다이아몬드의 필드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숫자로 이야기될 수 없는 수많은 땀과 눈물의 감동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원래 함부로 말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감 선수처럼 진정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 김종현 감독의 기억 속 핀잔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네가 감사용이냐? 그렇게 간절한 꿈을 가지게?"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새, 불사조 박철순
24승(22연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 첫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 기록. 1982년 박철순이 받은 성적표다. 최우수선수상, 방어율 1위, 승율 1위, 다승 1위…… 아마 1982년은 그의 인생 최고의 해였을 것이다.
1982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슈퍼스타 감사용>은 박철순의 화려한 날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1982년 이후, 박철순의 화려한 날들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1983년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송영운의 타구를 허리에 맞고 박철순은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떠났다. 그의 부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상과 재기,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시련 속에서 그의 별명은 바뀌었다. 1982년, 야구모자 뒤편으로 볼록하게 길러진 그의 뒷머리를 보며 팬들은 '아톰머리'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진통제를 너무 많이 맞아서 그의 머리카락은 빠졌고,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아톰머리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그게 바로 '불사조'였다.
이집트 신화에 나온다는 불멸의 새. 죽어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는 불멸의 새. 박철순의 야구생명은 끝났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야구선수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던 박철순이었다. 그는 오뚜기처럼 넘어져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다.
1986년 롯데 자이언츠와 OB 베어스의 경기가 열렸다. 이날 박철순은 재기의 의지를 불사르기 위해 삭발을 했다. 스포츠 신문의 1면에는 '불사조, 삭발투혼'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가 롯데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고 난 후, 1루 관중석을 향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할 때, 관중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때였다. 잠실 야구장에 프랭크 시네트라의 <마이웨이>가 울려 퍼진 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오랫동안 그날을 기억할 것이라고 예감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려고 했던 남자, 마지막까지 야구선수로 기억되고 싶어했던 남자가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