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 아주머니가 내 온 음식과 차. 우리네 옛 이웃 사람들의 정겨움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다.최성수
돌아오는 길, 한 겔에 방문을 한다. 그러나 겔에는 아무도 없다. 잠시 겔 주위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허겁지겁 아주머니가 나타난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잡아끌고, 먹을 것들을 내온다. 마치 우리네 어린 시절 이웃 집 ‘마실’을 가면 반가이 맞아 주던 동네 아주머니 같다.
수더분한 얼굴에 연신 내온 것들을 먹어보라고 권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정겹다. 그러나 내다 준 치즈 같은 먹을 것들은 시디시어 입맛에 맞지 않는다.
우물에서 물을 푸다가 왔다고 해서 우물을 한 번 보자고 하니까 여기서 아주 멀단다. 아저씨는 안 계시냐고 하자, 도망간 낙타를 찾아 갔단다.
낙타가 왜 도망을 갔느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웃음을 가득 띤 얼굴로 대답한다.
“너무 가뭄이 들어 먹을 풀이 없거든요. 그래서 풀을 찾아 멀리 가버린 거랍니다.”
“그럼 어떻게 찾아올 수 있나요?”
“남편이 말을 타고 찾아 갔어요. 아마 물이 있는 곳으로 갔을 테니 찾아 올 거예요.”
얼마나 멀리 간 것 같으냐니까 가깝다며 대답하는 거리가 한 250km란다.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거리인데, 사막의 삶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그저 가까운 거리라니. 그 먼 거리를 말을 타고 달려 낙타를 찾아와야 하는 이 몽골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인적조차 드문 곳에서 가난과 맞닥뜨리며 살아서일까? 그저 사람들만 보면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순박한 사막의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 같은 도시인의 삶은 거추장스러운 때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이레쯤 걸려야 돌아올 것이라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주머니의 사막의 밤은 또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계속 이동하면 외지 나가있는 자식들은 어떻게 찾아오죠?“
그래도 아주머니는 웃으며 자랑스레 입을 연다.
“우리 아들 둘이 울란바토르에 살아요. 큰 아이는 의사고, 작은 아이는 변호사고.”
“겔은 옮겨 다니는데, 아들들이 고향에 오면 어떻게 집을 찾아오나요?”
내가 엉뚱한 질문을 하자 아주머니는 웃으며 전화 받는 시늉을 한다. 전화 연락을 하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동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칭기즈칸의 후예들. 그들에게 우리네 같은 정착민이 갖는 물건이나 땅에 대한 애착은 그저 사막을 불어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덧없는 것일 뿐이리라.
아득하게 사라지는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드는 아주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니 마음이 짠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