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을 <비급 좌파>와 함께

[책읽기가 즐겁다 100] 피붙이들과 깨어 있는 생각을 나누자

등록 2004.09.24 15:19수정 2004.09.2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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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와 보수를 넘어 옳은 생각으로

a <비급 좌파> 겉그림입니다.

<비급 좌파> 겉그림입니다. ⓒ 야간비행

.. 과연 한국 영화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가. 제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자신들이 놀랄 정도'로 열심인 영화인들은 남의 밥그릇에는 어떤 관심을 보였던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민족이라는 이름에 호소하는 영화인들은 정작 민족이 불행할 때 어디에 있었던가 .. <90쪽>


진보가 진보답고 보수가 보수답다면 우리 사회는 아주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소리로만 외치는 진보나 보수가 아니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진보나 보수가 아니라면 어떤 주의나 주장이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알뜰하게 가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제자리걸음을 걷거나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어 버립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의나 주장이라도 그 주의와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과 함께 둘레에 있는 이웃과 다른 목숨붙이를 헤아릴 수 있다면 진보든 보수든 삶을 가꾸고 자연과 어울릴 수 있는 훌륭함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나 사회는 어떻습니까? 진보가 진보다운지요? 보수가 보수다운지요? 좌파는? 우파는? 중도라 할 만한 사람이 있기나 한가요? 가만히 헤아려 보면 말과 이름으로만 좌파와 우파를 내세울 뿐, 속알맹이가 알뜰하고 아름다운 좌파나 우파나 진보나 보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두들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쪽'에서만 생각하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만들고 영화에 나오는 이들은 '스크린쿼터를 사수해야 한다'고 머리까지 싹 밀어버리지만, 다른 일에는 이렇게 나서지 않는다는 김규항씨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연예인 ㅇ씨가 성노예(종군위안부)로 끔찍한 아픔을 겪어야 한 할머니 마음에 더욱 깊은 생채기를 남길 때에 ㅇ씨를 꾸짖은 동료 연예인이나 영화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 앞서는 영화인들이 쌀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기도 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어요. 아직 한참 멀긴 했지만 지금 같은 소걸음이라도 차근차근 걸어가 주면 좋겠습니다.


한글만 쓰기 문제라든지, 지역 도서관을 키우는 문제라든지,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참답게 공부하고 자기 젊음을 누릴 수 있는 교육 터전 문제라든지, 우리 사회를 비틀려 놓고 시커멓게 만든 친일매국노 청산하는 문제나 언론 개혁 문제라든지, 일본과 중국이 우리 역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문제라든지, 우리 겨레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남북 하나되기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에도 차츰차츰 눈길을 돌리고 함께 나설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화인뿐 아니라 운동가나 활동가도, 지식인이나 경제인도, 정치꾼이나 문화예술가나 과학기술자 또한 자기 밥그릇과 얽힌 일에만 나서는 편입니다. 우리 사회를 통틀어 아름답고 알뜰하게 가꿀 문제에서는 왜 그런지 입을 굳게 다물거나 '내 일이 아니다'고 말하거나 '할 일이 많아서 신경 못 쓴다'고만 말할 뿐입니다.


옳은 일이라면 어깨동무하고 함께 나서는 사람이 드뭅니다. 옳은 일이라면 사상이나 주의를 넘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을 좋게 풀어나가는 방법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드뭅니다.


<2> a급이냐 c급이냐가 아니라 '옳음'이냐이다

..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의 세계'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 가능한 암호 언어(그들이 '지적 대화'라고 부르는)로 그들의 서푼짜리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 <123쪽>

김규항씨가 여러 해에 걸쳐 쓴 글을 모아 묶은 <비급 좌파>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나온 지는 여러 해 지났는데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더러 실린 글을 잠깐잠깐 읽기는 했는데 한 자리에 모아 놓은 글을 읽으니 느낌이 남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김규항씨를 '마초'라 하고(그런데 '마초'가 대체 무슨 말일까요? '대마초'를 줄인 말은 아닐 테고…. '지적 대화'라고 할 만한 이런 말을 도대체 왜 쏟아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이 우러르고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굳어 있는 자기 생각을 일깨워 준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그저 논객일 뿐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이 이름조차 모릅니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기에 사람을 생각하고 말할 때도 다르게 비평할 테죠? 그렇다면 김규항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저는 왜 김규항씨가 지은 <비급 좌파>란 책을 한가위 명절날, 온 식구가 둘러앉아 함께 이야기하고 돌려읽을 만한 책이라고 말할까요?

지난 7월 끝무렵, 김규항씨와 함께 경북 안동으로 간 일이 있습니다. 혼자서 조용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동안 쓰신 글로 받은 인세만 해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인세를 자기 자신이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는 한푼도 쓰지 않고 모두 어려운 이웃과 힘여린 모임을 뒷배하는 데 쓴 조그마한 할아버지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그날, 권정생 선생님이 <월간 작은책>에 쓰신 '이라크 파병과 얽힌 우리들 몸가짐 문제(글이름 "승용차와 아파트를 버려라")'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는데, 김규항씨는 이렇게 자기 생각을 밝혔습니다. "사람들이 글만 애호한다"고요. 권정생 선생님이 말씀하는 온갖 좋은 이야기를 자기 일로 여겨서 실천할 생각이 없이, 그저 권정생 선생님 글이기 때문에 글만 읽고 좋다고 말하고 실천은 조금도 안 한다는 소리예요.


.. 따가운 햇살 아래 모델 같은 몸매의 아가씨들이 잦은 집회로 길이 든 명동성당 입구를 따분한 얼굴로 흘끔거리며 지나가고, 성당으로 오르는 고급승용차들은 진입로에 주저앉은 보라색 스카프의 어머니들에게 끊임없이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저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자신들이 지켜 가는 다이어트에의 신념마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갇힌 이들의 신념 덕에 가능함을 알고 있을까. 고급승용차 뒷좌석에 우아하게 들어앉은 저 귀부인은 자신이 지켜 가는 종교에의 신념마저 한여름 땡볕 아래 주저앉은 저 어머니들의 뚫린 가슴 덕에 가능함을 알고 있을까 .. <136쪽>


김규항씨는 우리에게 'a급' 사상이나 이야기를 건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c급'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아요. '지적 대화'를 나누는 지식인들처럼 어깨 우쭐거리지 않으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엉뚱한 이야기를 사설과 칼럼에 버젓이 쓰는 속물들처럼 허튼 소리를 지껄이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는 '옳은'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김규항씨가 쓰는 말도 대체로 어렵긴 하지만 학자나 교수나 기자나 법관이나 정치꾼이나 문학가나 예술가나 과학자나 평론가처럼 뭐가 뭔지 알 길이 없는 말을 주절거리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소중한 이야기를 건넵니다. 작고도 하찮게 보이고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옳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애쓰는 이야기, 우리들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등돌리고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회운동과 사람들 이야기를 건네요. 그래서 'b급'입니다.

가진 이들이 못 가진 이들에게 동냥하듯 적선을 베푸는 운동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다는 사람들 스스로 뭉치고 힘을 모아서 모두 골고루 보람차고 즐겁게 살아가는 세상을 가꾸도록 일어서도록 이끄는 운동이 소중함을 말합니다.


<3> 김규항 씨가 우리에게 말하는 이야기

.. 한없이 가치 기준이 낮아진 세상은 정당한 가치 기준을 지키려는 한 인간을 비난할 필요가 있는 것이리라 … 그(서준식)가 생각하는 인권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권리이며 그의 인권운동은 더 이상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다 .. <199쪽>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진짜 무공해 먹거리가 부르주아의 식탁으로 직송되듯 진짜 열린교육은 부르주아의 자랑스런 가족사진을 장식하는 일에 봉사한다(248쪽)"는 말을 곰곰이 되씹어 봅니다.

"정말이지 한 아이를 한국의 학교에 들여보내는 일은 아무래도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니다(254쪽)"는 말을 다시 한 번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합니다.

"교양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계적인 교양서에 실린 인류 보편의 지성이며, '오늘 여기'의 모든 문제들은 그저 톨레랑스의 대상일 뿐이다(120쪽)"는 말을 '인도의 마더 데레사가 아니라 한국의 마더 데레사를 생각하라'는 어느 종교인 말과 겹쳐서 생각해 봅니다.

"지난 50년을 통틀어 그 신문이 지지해온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이다(138쪽)"는 말을 읽으며 말과 탈과 문제가 많은 자전거일보나 비데신문을 생각해 봅니다.

"이 나라의 성인(어른)들은 그들에게 곱고 바른 것을 많이 보여줄 의무가 있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해를 주는 현실이 '예술작품 속의 현실'인가 '실제 현실'인가 하는 점이다(142쪽)"는 말에 밑줄을 긋고 차분하게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김규항씨는 어떤 사람일까요? 김규항씨가 말하거나 건네거나 스스로 애쓰는 '아름다운 사회'와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상식이 상식다울 수 있는 사회, 참과 거짓이 참과 거짓 그대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제대로 둘을 가누고 평가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닐까요?

사람들이 좌파일 것도 우파일 것도 없으며 a급일 것도 c급일 것도 없는 한편, 지식인이든 아니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돈과 힘이 있건 없건, 함께 즐거울 수 있고 서로 오순도순 지내면서 사랑과 믿음이 골고루 이루어지는 사회는 아닐까요?


.. 당시는 당시의 엄혹한 상황을 핑계로 삼는다 해도 우리가 그후 일관되게 도살자의 충실한 공범 노릇을 해온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변명할 수 있는가. 도살자가 제 손에 묻은 피를 씻고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칠 때 압도적인 찬성을 보내고 도살자를 대통령으로 뽑고 도살자의 '정의사회 구현'을 지지하고, 그도 부족해 도살자의 충실한 동료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준 우리의 죄를 말이다 .. <207~208쪽>

요즘 서울 시내에는 자가용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나라살림이 어렵고 다들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는 데도 차가 참 많아요. 대중교통 삯이 많이 올라 힘들다고 하는 데도 자가용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국제통화기금 날벼락을 맞은 1998년을 생각하면 너무도 뜻밖인 일입니다.

참으로 요즘 우리 사회가 어려울까요? 요즘 많은 이들이 말하는 어려움이란 "가진 이들이 자기 재산을 더욱 크게 부풀리기 어려운" 일은 아닐까요?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으로 겨우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람들 어려움이 아닌 "가진 이들만의 어려움"으로 우리 사회 여론이 비틀려 있지는 않을까요?

김규항씨는 우리에게 눈을 뜨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도, 세상이 더러워지는 까닭도, 세상이 아름답게 거듭나는 일도 모두 우리가 눈을 얼마나 뜨고, 얼마나 두 손에 힘을 모아 어깨동무하고 일어서서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합니다.


<4> 지역이 중요하기에 지역주의

저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가위 명절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거나 사는 곳에서 살갑고 따순 분들을 만나는 명절입니다. 이런 명절에도 일터에서 꼬박 지새워야 하는 사람이 있고, 갈 고향이 없어 소주잔을 기울일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할 '지역'이 있어요. 경상도이든 전라도이든 충청도이든 함경도이든 서울이든 모두에게 지역이 있습니다.

저는 지역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역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큼 다른 이들도 자기 지역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여기고 가꾸는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가장 좋고 아름답게 여기는 지역을 가꾸면서 이 힘을 하나로 모으면 좋겠다고 봐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지역감정이든 자기가 지지하는 어느 정파이든 무엇이든 얼마나 '옳은 길'을 생각하고, 얼마나 다 함께 어울리고 즐거울 길을 생각하는가요?

김규항씨가 펼치는 <비급 좌파> 이야기는 우리들이 눈을 제대로 뜨도록 이끕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참말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살필 일이 무엇인지, 너나없이 찾아서 즐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일러줍니다. 그래서 한가위 명절에 이 책을 선물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려요.

입시공부로 바쁜 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도, 대학교에 들어가 전공 공부보다는 취업 걱정에 골머리를 앓는 대학생에게도, 바쁘고 고단한 일터에서 힘 빠지는 직장인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이런 책을 선물하고 선물 받으며 함께 이야기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김규항씨가 틈틈이 쓰는 글은 "http://gyuhang.net"에 들어가면 구경할 수 있습니다.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야간비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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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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