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도 돈주고 사야 하는 겨?"

이젠 물도 사 마셔야 하는 세상입니다

등록 2004.09.26 12:41수정 2004.09.2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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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녀석의 방에서 ‘딱풀’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지문화제 체험행사 때 제 손으로 만든 종이접시 위에 고이 모셔 두었군요. 예전에 쓰던 풀에 비하면 꽤 쓸만하지요. 고체여서 쓰기도 편하고 깜빡 뚜껑을 연 채로 방치해도 굳어버려 못쓰는 일이 없습니다.


이기원
어린 시절 학교에 입학해서 색종이와 풀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어머니는 집에서 밀가루로 풀을 쑤어 성냥갑에 담아 주셨습니다. 색종이 사라고 달걀 하나 손에 쥐어 주시면서 깨지 말고 잘 가지고 가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지요. 그 시절엔 누구나 집에서 쑨 풀을 가지고 와서 특별히 창피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쑨 풀이 아닌 돈을 주고 산 풀을 가지고 오는 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집에서 쑨 풀이나 다를 바 없는 조잡한 풀이었지만 성냥갑이 아닌 플라스틱 통에 담긴 풀을 가지고 오는 애들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요.

집에서 쑤어서 성냥갑에 담아 가지고 온 풀은 물기가 많아 흐물거립니다. 더구나 종이로 만든 성냥갑에 넣어 가지고 왔으니 성냥갑조차 축축해져 흐물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사온 풀은 물기가 거의 없습니다. 플라스틱 통이니 물에 젖어도 끄떡없습니다. 똑같이 손에 묻혀 색종이에 발라야 하는 거지만 플라스틱 통에 담긴 풀이 한없이 좋아보였습니다.

어머니께 풀 사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떼도 써보았지만 그때마다 허사였습니다. 집에 밀가루 있는데 구태여 풀을 사야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풀은 절대 사줄 수 없다며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언제나 한결 같았습니다.

"풀도 돈 주고 사야 하는 겨?"


그러던 어머니의 고집이 꺾인 게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습니다. 달팽이를 팔러 장에 갔다 오시면서 아들 녀석이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풀을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다 주신 플라스틱 통에 담긴 풀이 얼마 가지 않아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뚜껑만 열고 뒤집어 문지르면 풀칠이 되는 새로운 게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에 풀을 묻힐 일이 없는 거지요.


이 풀은 어머니를 조르지 않고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공책을 산다고 돈을 타서 풀을 산 것입니다. 어머니를 속여 산 풀은 제대로 쓰지도 못했습니다. 신기해서 이리저리 풀칠을 하며 놀다가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고 놓아둔 탓에 병 입구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입니다.

아들 녀석의 방에 놓인 딱풀은 굳어 못쓰게 될 염려가 없습니다. 독성도 없고 안전한 풀이라고 쓰여 있군요.

돌아보니 풀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변한 건 풀만이 아닙니다. 이젠 물도 사 마셔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물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조차도 돈에 의해 요동치는 세상입니다.

일년 중 가장 넉넉하다는 한가위입니다. 돈으로 만들어진 풍요가 아닌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이해해주는 사랑이 넘치는 풍요로운 한가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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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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