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눈으로 '나'를 보기

전남 담양연수원에서 보내는 편지(3)

등록 2004.09.27 08:44수정 2004.09.2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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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칠판에 글씨를 크게 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제 기억 속에서 오래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1급 정교사 연수를 받고 있을 때 교수법을 강의하던 장학사였지요. 그가 칠판에 써놓은 글씨는 마치 글자 위에 돋보기를 들이댄 듯하여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도 초점을 모으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거나 목을 앞으로 길게 내밀지 않고도 넉넉하고 편하게 수업을 할 수가 있었지요. 지금 제가 칠판에 쓰는 글씨의 크기가 딱 그만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정도로 글씨가 커 보였지만 지금은 눈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제가 보기에도 편안합니다.

언젠가 동료교사의 연구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칠판에 쓴 글씨들이 너무 작아서 뒤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목을 길게 내밀기도 하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글씨를 확인하고 돌아와 필기를 하는 아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지요.

수업이 끝나자 저는 그 동료교사에게 칠판의 글씨가 작아 뒤에서는 잘 안 보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뭐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뒤에서야 당연히 잘 안 보이겠죠."

솔직히 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저도 그때 그 장학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동료교사의 충고에 엇비슷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잘 안 보이는 줄 알면서도 글씨를 크게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타 직종과는 달리 교사의 직무연수는 가르치는 처지에서 배우는 처지로 위치가 뒤바뀐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가 수업을 마치고 나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수업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한참 열을 올리며 불만을 털어놓다가 문득 가슴이 뜨끔해질 때가 있지요. 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본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 그때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요?

윤 선생님,


저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마치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듯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10년 전에도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 저의 꿈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제나 좋은 교사의 꿈을 졸업하고 또 다른 꿈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한 가지 꿈을 이루기에도 벅찬 까닭에 아예 다른 꿈을 가질 엄두를 못 내기도 하거니와,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 갈수록 더해지기 때문이지요.

이곳 담양에 와서 무엇보다도 즐거운 것은 행동거지나 말투, 심지어는 눈빛까지 그대로 빼닮고 싶은 원어민 강사를 만난 것입니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을 유일한 꿈으로 지니고 사는 저로서 좋은 교사의 모델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경이로운 대상을 대하듯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지요. 티끌 같은 사람도 그녀 앞에서는 태산이 되고 맙니다.

그녀의 눈빛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저도 가끔은 아이들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조건에 상관없이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생명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지요.

나는 딱 그런 심정인데 아이들은 그런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닭살이나 돋지는 않았을까? 너무 잦은 애정 표현에 오히려 식상해하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늘 궁금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저는 아이들의 행복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윤 선생님,

추석 명절을 쇠기 위해 잠시 연수원을 떠나왔습니다. 학교 근처에 집이 있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울컥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다음 주면 아이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할 수 없이 큰 행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들을 잘 갈무리하여 좀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음 주면 선생님께도 마지막 편지를 드리게 되겠군요. 추석 명절 잘 보내시고 그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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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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