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의 <독학자>
배수아의 <독학자>를 직접 구입하기 전, 이 책을 다룬 어느 신문 서평에서는 배수아가 점점 대중, 독자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를 보냈다. 말하자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하고 추상적인 소설을 썼다는 것인데, 그 기사를 읽은 나 또한 ‘그러면 그렇지’라는 식으로 비웃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책 대여점에서 빌려 읽은 <랩소디 인 블루>는 그 당시 센티멘털하기 이를 데 없는 여고생의 신분이었음에도 그 낭만성과 자기애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 뒤 배수아는 엽기와 냉소로 무장된 소설을 주로 발표했다. 물론 내가 그 소설들을 몽땅 다 챙겨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심야 통신>의 몇몇 단편들과 <나는 니가 지겨워>, <붉은 손 클럽> 등을 전전하며 만난 배수아의 작품은 엽기의 남발, 과장된 낯설음, 깊이 없는 냉소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읽었을 때, 나는 사실 두려웠다. 처음에는 '이 소설은 배수아의 소설들과 참 다르군' 하는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배수아가 다른 소설을 쓴 게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내 눈이 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전까지 내가 싸늘하게 비웃었던 모든 것들을 정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는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데, 그것이 소설에 해당될 경우에는, 매우 인색한,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독학자>는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 보았던 배수아 소설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에서도 느꼈듯 이제 배수아는 배수아식 소설, 배수아식 주제, 배수아식 문체를 찾아낸 듯 보인다.
사실 엽기, 냉소 코드가 젊은 여성들이나 마니아층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는 있겠지만, 그게 문학으로서 얼마나 생명력이 있을지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배수아를 좋아한다는 몇몇 젊은 친구들에게 겉으로는 아니었지만 속으로 ‘겉 멋든 철없는 녀석들’이라는 식으로 단정 지은 적도 많다.
그러나 지금 나는 배수아에 대한 그 전의 모든 편견과 단정들을 어느 정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물론 이전 작품들을 다시 읽어 본다면, ‘굳이 수정할 필요는 없겠다’쯤으로 정정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독학자>의 표지에서 드러나듯, 출판사나 편집자가 강조점을 둔 것은 ‘학’인 듯하나,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 참고로 표지에서 ‘독학자’라는 글씨 중 ‘학’이라는 글자가 도드라져 있으며, 겉표지는 무려 14권의 책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이 책을 좋아하는, 좋아한다기보다는 반쯤 미쳐 있으며 책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두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적어도 나는 강조점을 거기에 두고 싶지는 않다.
전두환과 이한열, 독재 정권, 넥타이 부대 등 몇몇 상징들로 단순 요약되는 1980년대, S와 주인공 나는 철저한 아웃사이더(될 수 있다면 완전히 고립된 존재)이기를 바라며 지적 편력에 빠져든다.
시험을 보지 않아도 집회에만 참가한다면 얼마든지 도덕성을 보장받을 수 있고, 시험 점수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현실에 분개하는 이들은, 누가 보아도 ‘덜 떨어진’ 이방인, 또는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스무 살 청년에게 책은 이 참을 수 없는 획일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것이 썩 좋은 수단인 듯하지는 않는데, 이는 ‘책’의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언어가 존재한다. 거칠게 분류하면 사람들의 무심함이나 위선 때문에 결국 껍데기로 전락해 버리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궁극의 언어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문학의 언어다. 하지만 중학생 때 S가 깨달았듯 타인이 없이는 착하거나 악한 일의 경계 자체가 불필요하며, 그러면 비망록에는 아무 것도 적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상의 언어를 배제한 문학의 언어, 라는 가정은 사실 농도 100%의 오렌지 주스를 바라거나 순도 100%의 금반지를 기대하는 것처럼 애처롭지만 불가능한 바람이다.
따라서 그들이 선택한 ‘책’이라는 대상은 그들이 말하고 기대했듯 문학의 언어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일상의 언어에 대한 혐오나 부정일지라도 온전히 그것을 배제한 언어는 아니다. 결국 혐오스러운 현실을 피해 선택한 ‘책’은 오히려 그 현실을 기반으로 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인 셈이다.
주인공이 말했듯 군중없는 개별자는 없기에, 개별자는 군중을 필요로 하지만, 생각해 보라. 그것이 군중이든 무엇이든 간에 특정한 대상이 있을 때만 ‘개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개별자’는 이미 개별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구별 짓기는 결국 실패에 가까워지고 둘은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짧은 반바지를 입고 교정을 누비는 여학생을 흠모하게 된 S, ‘보지’라는 끔찍한(?) 단어가 담긴 시를 읽어 주며, 그만큼 혐오스러운, 하지만 누구도 피할 갈 수 없는 그 ‘보지의 세계’에 대해 깨달은 그는 자신을 용서하라며 무릎을 꿇는다.
사람들이 늙은 다음에는 그들의 스무 살 어느 여름에 대해서 들판의 암소들처럼 각자 이러쿵저러쿵 떠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스무 살의 한가운데에 있고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으며 검은 바다의 등불처럼 소중한 내 친구, 내 유일한 벗, 영혼의 길동무이자 서툴고 먼 연인인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길에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살아갈 것이다.
대학의 어둠침침한 지하 구내식당에서 그는 이제 다시 고독한 괴짜 뚱보로 불리며 혼자가 되겠지. 그러나 외형적으로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며 내 일생도 남들에게는 결코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혹은 각자 서로가 그렇게 몽상가와 괴짜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함께 있는 듯 느낄 수도 있으리라.
이렇듯 결국 차갑게 이별한 그들은 마침내 독학자가 된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 그들이 책으로 현실과의 경계를 튼튼히 쌓은 기세등등한 독학자(獨學者)가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처럼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스스로를 표현할 것’이므로, 그들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떠한 존재로서의 독학자,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독학자, 또는 독학자라는 표현을 벗은 어떤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질문은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이 소설의 의미는 우선 그 ‘상상할 수 없는’이라는 단서를 찾아내는 데 있지 않을까.
독학자
배수아 지음,
열림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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