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당근 맞아?" ... "당근이지!"

[오클랜드 하늘에 뜨는 무지개 27] 당근이 아니라 홍삼일세 그려

등록 2004.10.01 12:58수정 2004.10.0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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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에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에 아내는 뒤뜰에서 당근을 캐냈습니다. 지난 5월 초에 여린 모종을 심었으니 거의 5개월만의 수확입니다. 모종 화분에 꽂혀 있던 안내표지에 따르면 당근은 3개월(12주)이면 숙성이 끝난다고 적혀 있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당근 모종을 심은 시기는 겨울로 접어드는 때였고 심은 곳도 나무울타리 때문에 볕이 거의 들지 않는 화단이었기에 이처럼 수확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당근은 처음 심어본 야채였기에 우리의 기대는 컸고, 예상보다 수확이 늦어지는 동안에도 우리는 손수 키운 당근 맛을 볼 날이 언제가 될는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지요.

a 5개월 전에 심었던 여린 당근 모종들

5개월 전에 심었던 여린 당근 모종들 ⓒ 정철용

그러나 지난 5개월 동안 땅 속에서 자라다가 마침내 그 모습을 보여준 당근들의 모습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렸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며 나와 보라고 소리치는 아내의 종용에 뒤뜰로 나가보았더니, 아내는 화단에서 캐낸 당근들을 일렬로 가지런히 늘어놓았더군요.

"이거, 당근 맞아?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못생기고, 덜 생겼는지…."

아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당근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쭉쭉 시원스럽게 뻗어나간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정말 한 뿌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단에서 막 캐낸 당근들은 한결같이 비비꼬이고 잔뿌리들이 잔뜩 돋아나 있어서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기형아나 기형어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이거 모두 버려야겠어요. 징그럽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작으니 뭐 먹을 게 있겠어요?"
"잠깐만. 그래도 맛은 봐야 될 거 아냐. 내가 골라낼 테니까, 그냥 놔두고 들어가."


헛농사 지었다며 50여개나 되는 당근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으려고 하는 아내를 만류하고는 나는 쪼그려 앉아 찬찬히 쓸 만한 당근들을 골라냈습니다. 비비꼬이고 뒤틀린 그 뿌리들이 안쓰러웠습니다.

a 5개월이 지나 수확한 당근들은 하나같이 비비꼬인 모습들이었다

5개월이 지나 수확한 당근들은 하나같이 비비꼬인 모습들이었다 ⓒ 정철용

얼마나 우리 화단 땅이 척박했으면 저렇게 몸을 뒤틀면서 뿌리를 내렸을까? 당근 모종을 심기 전에 땅을 깊이 파서 충분히 갈아 엎어주었으면 저런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런 자책감을 느끼며 자세히 바라보면서 당근들을 골라내고 있자니, 비비꼬인 당근들의 뿌리가 이제 더는 흉측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인삼이나 도라지 뿌리처럼 귀하게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너무 작은 것들을 솎아내고 골라낸 것이 모두 서른 여섯 뿌리였습니다. 그걸 부엌의 개수대에서 깨끗이 물로 씻어냈더니 정말 영락없는 인삼 뿌리더군요. 아니, 붉은 색이니 홍삼인가요?

"이거, 당근이 아니라 홍삼일세 그려. 한번 맛을 볼까나?"

나는 그 중의 한 뿌리를 골라 껍질을 벗기고 당근 맛을 보았습니다. 당근 특유의 향취가 진하게 풍기면서도 단맛이 제법 든 것이 무척이나 맛있더군요. 못 생겨도 맛은 좋은 것이 호박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맛이 들었네. 생긴 것 봐서는 맛대가리 하나 없을 것처럼 보이드만…."

내가 건네준 당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 한 마디 거듭니다. 이렇게 맛있는 걸 그 겉모습만 보고서 그냥 버리고 말았다면 지난 5개월 동안 어두운 땅 속에서 이 순간을 기다렸던 이 당근들이 얼마나 슬퍼했을까요?

a 깨끗이 씻어놓고 보니 당근이 아니라 인삼 뿌리처럼 보인다. 가운데 당근은 슈퍼마켓에서 산 보통 당근.

깨끗이 씻어놓고 보니 당근이 아니라 인삼 뿌리처럼 보인다. 가운데 당근은 슈퍼마켓에서 산 보통 당근. ⓒ 정철용

깨끗이 씻은 당근들을 일일이 껍질 까서 플라스틱 그릇에 담으니 겨우 한 통입니다. 보통 당근 두세 개 정도 분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5개월 동안 우리가 마음 속에 품었던 기대가 거기에 담겨 있으니까요.

못 생겼다고, 덜 생겼다고 그 당근들을 버리고 말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품었던 기대도 스스로 쉽게 저버리는 꼴이 되었을 테지요. 우리가 오늘 캐낸 이 당근들은 모습과 크기로는 우리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지만 그 맛으로는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키고도 남습니다.

깎아놓은 당근으로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하며 아내와 나는 마주보고 웃습니다.

"야, 못생겼어도 당근은 당근이네. 그치?"
"당근이쥐. 당근 맛이 어디 생김새 따라 달라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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