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 윤증(1629~1714) 선생의 초상화윤형권
사연인즉 이렇다. 한국 양반가의 대표적인 파평 윤씨이며 조선시대 대학자인 윤증 선생은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불리는데, 학식과 인품이 높아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등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지만 번번이 사양하고 이곳 향촌인 노성에서 백성들 교화와 학문정진에만 몰두한다.
윤증 선생의 높은 학문세계와 몸소 실천하는 고매한 인격 때문에 소장파인 소론들로부터 추앙을 받는다. 윤증 선생에게는 학문과 실생활이 동떨어진 게 아니라, 학문을 실생활에 반영하는 실학사상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윤증 선생의 사상은 돌아가시기 전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에도 나타나는데,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유밀과와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고 제물 장만할 때 종이로 입을 봉해 침이 튀지 않게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고 한 것. 그 뒤로 윤증 선생의 후손들은 제삿상에 떡과 유밀과 기름이 들어간 전 등을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써 윤증 선생이 허례허식을 따지는 명분보다, 실학사상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여성을 배려한 사려 깊은 마음씨까지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1년에도 수십 번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 사대부 집안에서 제삿상 차리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닐 뿐더러, 지나친 제삿상 차림은 낭비로 이어져 당시 사회적 폐단으로까지 지적될 정도였다.
여성을 배려한 실학사상이 드러난 윤증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