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만만하고도 사랑스러운 '장승'

사람을 만나는 잔잔한 여행(1) 장승과 솟대를 만드는 장인 이가락씨

등록 2004.10.02 11:40수정 2004.10.0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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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마을 어귀에는 '험상궂지만 다정한' 얼굴로 서 있는 장승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솟은 기러기와 오리 모양을 한 솟대를 만날 수 있다. 그 '험상궂지만 다정한' 얼굴을 한 장승은 험상궂은 쪽으로는 악귀를 쫓고, 다정한 쪽으로는 익살맞게 이방인을 맞는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장승과 솟대는 그 흔적을 멀리 삼한에서 찾아야 할 정도로 우리 토속 민중문화의 질긴 뿌리이다.


a 장승문화연구소 앞에 세워진 이가락의 솟대와 장승. 솟대의 길고 가녀린 장대는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을 하늘에 전하려는 표징처럼 보인다.

장승문화연구소 앞에 세워진 이가락의 솟대와 장승. 솟대의 길고 가녀린 장대는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을 하늘에 전하려는 표징처럼 보인다. ⓒ 곽교신

딱 열 평 넓이라는 작업실에는 제작 중인 솟대며 장승이 가득하다. 이번에 찾은 곳은 강원도 춘천시 동면 소양강가에 위치한 '장승문화연구소'다. 방금 보고 돌아서서 다시 보면 또 뭔가 새로운 것이 '짠!'하고 나타날 것 같은 어린시절 내 보물단지 같기도 하다.

이가락(48·본명 이범형. 강원도 춘천시 동면)씨는 가장 사랑하는 것도 장승이고, 가장 만만한 것도 장승이라고 말한다.

"나보다 훨씬 못생겨 만만해보여서..."

1968년 중학교 1년이던 때에 '내 언젠가 저걸 꼭 하리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후 1985년부터 만사를 접고 장승을 시작했다. 이제는 관련된 행사만 있으면 그를 찾을 정도로 민속학계에서는 그의 재주를 인정하지만 미개척분야에서 이름을 알릴 때까지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현재 민속학계에서는 그를 '살아 있는 장승 이가락'이라고 한다. 또한 이씨는 나라 안에 유일한 '국가지정 장승기능전승자'로 월 80만원의 기능전승 지원비를 국가에서 지원 받는다고 한다.


2일 문화올림픽으로 불리는 전 세계 박물관의 큰 잔치인 '제20차 세계박물관협의회(ICOM) 서울총회'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된다. 그는 60년 ICOM 역사상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리는 이 큰 잔치판에서도 활약을 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민속박물관에서 이가락씨를 불러낸 것이다.

우리의 박물관 문화정책은 전반적으로 뒤떨어져 있지만 '무형문화재의 보호'에 관한 한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다. '아시아 최초 ICOM 총회 개막'은 그런 의미의 대접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부제도 '박물관과 무형문화유산'이다. 문화 자존심이 센 프랑스 출신의 자크페로 ICOM 회장도 '한국의 무형문화재 보호 시스템을 배워가겠다'는 속내를 기자들에게 주저 없이 말하고 있다.


이 세계적 잔치판에서 장승과 솟대의 제작 과정을 중심으로 한 시연을 펼칠 이가락씨는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씨의 장승에 대한 검증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에 장승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얻은 바 있으며, 이미 한 차례 유럽 비평계의 검증을 거친 그의 장승이지만 이번의 ICOM행사는 매우 각별하다.

a 연구소 앞에서 작업에 몰입하는 이가락

연구소 앞에서 작업에 몰입하는 이가락 ⓒ 곽교신

'왜! 장승 솟대에 정열을 쏟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점점 사라져가지만 솔직하고 진한 토속적 예술성에 언젠가는 세상이 주목할 것이란 신념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남 합천군 적중면 남산국민학교 4학년 시절, 그가 낫 하나를 들고 소나무 토막으로 팽이를 깎으면 정확히 중심이 맞고 잘 돌아 동네 아이들이 1원씩 주고 사갔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타고난 손끝 감각은 장승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그때 이미 장승과 함께 살아갈 팔자였나 보다.

1979년 좋은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강원도 인제로 들어갔다가 1989년 춘천으로 옮겨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장승에 사랑을 쏟던 지난 세월은 이씨에게는 개인적인 아픔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가족에 대해 물어봤을 때 그는 "올망졸망한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함축된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대담에서 아픈 굴곡의 세월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험상궂지만 다정한' 장승의 얼굴은 그대로 그의 인생인 셈이다.

a ICOM 행사장에서 팔려 전세계에 우리 솟대를 알릴 소품. 각각 5달러, 10달러로 미공개된 소품이지만 오마이 독자를 위해 작가가 기꺼이 공개.

ICOM 행사장에서 팔려 전세계에 우리 솟대를 알릴 소품. 각각 5달러, 10달러로 미공개된 소품이지만 오마이 독자를 위해 작가가 기꺼이 공개. ⓒ 곽교신

ICOM 행사 소품 준비에 밤을 꼬박 새도록 바쁜 그는 긴 술자리를 마련하지는 못하지만 2년만의 만남을 그냥 보낼 수 있냐며 천종산삼으로 담갔다는 산삼주를 내 주었다. 그야말로 '일이 웬수'이지만 이런 따스함이 그의 모습이고, 인간미이다. 작업실 한 구석에서 본 "세상에 남이란 없습니다"란 작은 목판에 새겨진 귀절 그대로이다.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춘천 의암호반 공지천시민공원에서 열리는 소양강문화제에도 그의 체험장이 개설된다니 그를 만나는 여행이 쉬울 수 있겠다. 소양강 문화제가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지도를 받으며, 장승과 솟대를 직접 깎고 만들어보는 고급스런 체험여행의 기회가 될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추위가 살을 스며들수록 사람을 만나는 여행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세상에 남이란 없습니다"는 귀절은 이가락의 사람 사랑이 그대로 묻어나는 따뜻한 말이다. 그의 선한 눈빛을 만난 이 가을이 참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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