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정리, 그것이 왜 필요한가? ①

과거사 청산 작업에 거는 기대와 희망

등록 2004.10.13 08:06수정 2004.10.1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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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의 에피소드 한 가지를 기억해 본다. <태안문화원>의 '문화가족' 30여 명이 4박 5일 동안 중국 산동성 일대를 관광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옛날 당나라 시대부터 중국과 교역을 했던 서해의 뱃길을 따라 평택 항에서 정기 여객선으로 가고오고 했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휴게실의 탁자 주위에 여럿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의 입에서 과거사 정리 문제에 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문화가족 한 분이 갑자기 흥분을 했다. 60대의 농민인 그는 지금에 와서 과거사 정리라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갈 길도 바쁜 마당에 자꾸 과거의 일에 얽매이는 게 옳은 일이고 현명한 일이냐고 했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그냥 덮어두고,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서, 그 분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진 한 분이 더욱 흥분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더니 급기야는 "당신, 친일파지? 일제 때 당신 집이 일본 놈들 밑에서 덕 좀 보았지? 그래서 그러는 거지?"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 농민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일제 때 친일파 아니었던 놈들이 어디 있어? 일본 놈들 밑에서 살았으니까 다 친일파지!"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소를 하거나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에이, 그런 엉터리 말이 어디 있어. 그만 둬. 그까짓 놈의 얘기 백날 해보아야 그 타령이 그 타령이니께!"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보다도 어처구니없어 하는 분이 나를 돌아보며 한마디 해보라고 했다. 말하자면 '지원 요청'이었다. 그 분의 지원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말솜씨가 좀 있는 편이다. 말소리의 강약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잘 알고 있다.

그 날 내가 서해상의 정기 여객선 휴게실에서 대개가 5·60대들인 태안문화원 문화가족 여러분께 했던 얘기들과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오늘 여기에 정리해 본다.



1, 거짓 왜곡 뻔뻔스러움의 발원지이며 온상

'과거사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반민족행위자(일명 친일파)들에 대한 처벌 또는 처리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핵심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민족의 침탈로 말미암아 국권을 빼앗기고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배를 당했는데도, 그리고 비록 연합국의 2차 세계대전 승리의 결과이긴 하지만 무수한 민족 지사들의 희생과 일반 서민들의 피눈물 어린 고통 위에서 해방을 맞았는데도 일제에 부역했던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응징과 단죄를 기피했다는 것은, 일제 통치 전 기간에 걸친 부역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 죄악은 수많은 부산물들을 만들어내면서 우리 역사와 현실 안에 그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한때의 처벌 노력이 현실 권력의 힘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그 좌절은 결코 영원한 좌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었기에, 언젠가는 기필코 해결을 보아야만 할 과제로 우리의 삶 안에 늘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올바르지 못한 역사 진행의 최대 원인을 광복 이후 반민족행위자 처벌 실패에 두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비유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 비유는 광복 이후 6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조금도 변치 않고 우리 현실 안에서 오히려 더더욱 부피를 키우며 자각의 날을 세워가고 있는 상징적 실체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에 대한 반론(反論) 또한 만만치 않다. 그 반론들은 오랜 세월 현실 권력과 동반자 관계를 지녀왔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현실 권력과 충돌 양상을 빚고 있지만, 오늘의 현실 권력을 괴롭히는 비대 권력으로 존재한다. 오랜 세월 독재 권력과의 결탁 속에서 대세를 장악해온 그 반론들은 오늘에도 우리 현실 안에 강고한 힘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의 앞에서 소개한 60대 '문화 가족' 한 분의 예에서 보듯이 현실적인 막강한 힘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론은 어디까지나 반론일 뿐이다. 무릇 반론이란 반론의 숙명 속에서 존재한다. 그 반론들이 한 유명 작가에게서는 "나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어이없는 요설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일합방은 국제법으로 합법"이었다는 말로 표현되는가 하면, 소위 서울대 교수라는 사람의 입에서는 "일제 정신대는 거의가 자발적이었다"는 망발과 "일제 식민지 지배로 우리 경제가 발전했다"는 놀라운 궤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과 과거의 잘못된 일들을 오늘에라도 바로잡아 미래의 기틀을 참되게 다지려는 의지들이 이미 주론(主論)이 되어 있는 현실에서 그 주장들은 한갓 반론일 뿐이다. 아니, 반론도 되지 못하면서 반론이라는 미명으로 억지 포장한 요설이요 궤변일 뿐이다.

유명 작가와 명문대 교수라는 사람의 입에서 마구 배설되는 그런 요설과 궤변들이 수구 족벌언론들의 지면을 장식(?)하고 세간에 회자될 정도로, 그리고 그 말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질펀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아직 미망(迷妄)과 천박성의 늪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요설과 궤변들이 한결 낭자하고도 무성해진 이 시절의 현상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우리는 그것 또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거짓과 왜곡의 길이 아직은 험난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극복의 명제를 한결 명료하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에 나라를 들어 바친 매국노들을 비롯하여 일제 지배에 철저히 부역 봉사했던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지 못했던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 그 치졸한 역사로부터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굴곡들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인식은 이제 우리 현실에서 주론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해방으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정기를 가다듬어 미래 역사의 기틀을 참되게 다지려는 오늘의 명제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 발전의 장엄한 법칙을 애써 부정하며 끊임없이 훼방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오랜 세월 독재권력과 결탁하여 현실권력을 누려왔던 친일 수구세력이다. 그들은 오늘도 지나간 날의 향수에 젖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 그들은 60년 전의 반민족행위자들과 똑같이 오로지 반공이 유일한 무기이고 최대의 명분이다.

그들에게는 현실 부정만이 있고 과거 부정은 없다. 과거에는 눈을 감고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싶은 현실만을 부정하려하니 거기에서 자연 억지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제를 걱정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척하지만 그 걱정거리를 빌미로 확대재생산의 술수를 발휘한다. 어떻게든지 현 정권을 헐뜯고 흔들어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한다. 자신들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국제 사회에서 손해를 보는 것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그들의 속성에는 기본적으로 거짓이 내재한다. 거짓을 안고 가자니 온갖 논리로 자신을 분장하지 않을 수 없고, 일상적으로 왜곡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후안무치, 뻔뻔스러움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저 친일 수구 세력은 민족의 정기를 마비시키고 훼손하는 온갖 거짓과 왜곡과 뻔뻔스러움의 발원지이며 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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