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협상, 세 유령이 떠돌고 있다

[기고] 국제통상법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

등록 2004.10.22 10:47수정 2004.10.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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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올해까지 쌀협상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내년에는 관세화의무가 발생한다며 쌀 수출국가들과의 협상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내년 12월 홍콩에서 열리는 WTO 각료회의 전까지 협상시한이 연장됐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가 서두르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국제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의 주장을 싣는다....편집자 주

가을이다. 섬진강의 김용택 시인은 가을 들녘이 있기에 가을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렇지만 출렁이는 들판의 모습이 왜 여느 때와는 다르고, 속이 찰수록 고개 숙이는 벼들의 겸손함이 왜 처량하게 느껴질까?

대한민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농업협정에서 정한 여러 의무를 이행하기로 하면서, 쌀 수입을 계속 제한할 수 있는 특례조치(ST)를 명시적으로 보장받았다. 다만, 올해 특례조치 계속 여부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고 완료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쌀 협상단은 이달 안에 쌀 협상 최종 결과를 발표할 것이다.

만일 그 결과가 매우 당혹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는 어찌하려고 앉아 기다리고 있는가?

세 유령

1) 관세화 실익 비교론


정체 없는 유령이 쌀 협상을 지배하고,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 이름하여 '관세화 실익비교론'이다. 대통령과 국회는 특례조치를 계속하는 방안과 수입자유화(관세화)하는 방안, 두 가지의 실익을 따져 이로운 쪽으로 결정하자는 이 논리를 여전히 믿고 있는가? 지난 8월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는 올 해 말로 시한을 잡았던 새로운 통상질서협상(DDA)시한을 연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내년 12월 홍콩에서 각료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이 앞으로 5년 혹은 10년 동안, 수입쌀에 300% 대의 관세를 매길 수 있을지, 아니면 200% 대의 관세를 매길 수 있을 지에 대한 세부원칙(Modalities) 협상 타결이 올 해 안에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관세화의 실익을 판단한다는 것은 올해 안에는 불가능하다.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공무원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앞으로 몇 년간 수입쌀에 고율관세를 매길 수 있습니까?" 정직한 공무원이라면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지금은 모릅니다."

2) 9월 협상 시한론

다른 유령의 이름은 '9월말 협상 시한론'과 '자동관세화론'이다. 우리 정부가 쌀 협상 개시의사를 세계무역기구에 통보한 때가 2004년 1월 20일이었다. 바로 그 날, 동아일보는 "협상 상대국과 9월 말까지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쌀 시장은 자동적으로 관세화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보도하였다. 중앙일보는 "WTO 통보 시한인 9월말까지" 양자협상을 벌일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오늘 10월 26일, 아직 협상은 계속 중이다. 그 누구도 '9월말 협상 시한론'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래도 좋은가? 이 것이 쌀에 대한 예의인가? 쌀 농사는 농업인의 농사 소득의 절반을 차지한다. 쌀은 우리 문화의 한 가운데에 있다. 쌀은 농촌의 기초이다.

3) 자동관세화론

더 무례한 놈은 '자동관세화론'이다. 조선일보는 올 1월 20일 "올해 말까지 재협상 상대국들로부터 관세화 재유예를 동의받지 못하거나 협상이 결렬되면 WTO 협정에 따라 내년부터는 쌀 시장이 자동적으로 전면개방(관세화)된다고 정부관계자는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중앙일보는 올 4월 21일 "협상이 연말까지 타결되지 않을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상 내년부터 자동적으로 시장이 개방된다는 것이 농림부의 해석이다"라고 보도하였다. 천만에!

지금 외국 쌀을 수입하지 않는 이유는 세계무역기구의 협정 때문이 아니다. 허가를 받지 않고 외국 쌀을 수입할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게 한 양곡관리법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자동관세화론에 의하면 양곡관리법 조항도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 헌법이 대통령에게 준 조약비준권도 '자동빵'이다. 국회의 사전 동의권도 '자동빵'이다. 이처럼 헌법과 법률을 '걸레로 만드는' 자동관세화론이 출현하여 세상을 활보하였다.

쌀 협상 위기를 직시해야

위 세 유령을 물리치면, 무엇이 보이는가? 쌀 협상의 위기가 보인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공무원들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방안을 최종 결과로 보고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쌀 의무수입물량을 국내소비량의 8% 안팎으로 늘리고, 국내시판을 허용하는 방안을 선택하면 특례조치는 껍데기가 된다.

수입쌀에 매길 관세율조차 국제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세화 방안을 선택할 수도 없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우리가 받아 들일 수 없는 방안을 보고 받기 위해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농업계와 내부협상을 바로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은 농업계에 '향후 10년간 119조원' 운운하며 농업계를 일방적으로 설득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왜 우루과이라운드(UR) 직후의 10년간의 대책이 62조원의 돈을 쓰고도 실패하였는지를 농업계에게 물어서 배워야 한다.

불과 15년 전까지만도 유기농을 하는 농업인이 빨갱이 취급을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군사독재식 농업의 유산인 생산위주의 억압적 농정과 이를 뒷받침했던 농협의 문제를 대통령은 농업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대통령은 농업계와 농업혁신을 의논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형 통상국가론', '개방 대세론'으로 농업계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무역기구는 왜 나타났는가? 미국 농업이 구조조정 결과 농업생산력은 높아졌으나 유럽공동체 곡물시장을 잃으면서, 미국은 종래의 농업 보호주의가 이제 더 이상 미국 농업의 이익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이야말로 본디 농업보호주의의 대표였다. 개방 자체가 목적인 나라는 없다. 일본은 태국과 현재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진행하면서 쌀을 제외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처럼 통상정책은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관철하는 동시에, 내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다.

쌀 협상에서 농업의 이익을 더 옹호해야 한다

올해 안에 쌀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쌀 관세화의무가 발생한다는 주장은 세계무역기구의 협정에 명시된 바 없는 하나의 해석론이다. 필자는 올 8월경에 등장한 쌀 협상 미타결시 관세화의무발생론을 보면서,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대한민국이 1995년 농업협정 체결 당시, 진정 그렇게 합의해 주었다면, 지금까지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필경 관세화 의무 발생론자들은 올해 안에 쌀 협상이 타결될 것으로 예상했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바로 그렇다. 지금의 농업협정은 올 해 안에 협상을 타결할 것을 예정한 것이지, 미타결 상황에 대하여는 규정한 바 없다.

필자의 견해로는 관세화의무발생론은 타당하지 않다. 어떤 통상관료는 이렇게 말한다. "WTO 사무국에 비공식적으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원고가 이길 지 피고가 이길지 법원 직원에게 물어보았다고 알 수 있는가? 쌀 협상 결과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때에는, 수입 쌀에 매길 관세율을 국제적으로 합의할 때까지 협상을 성실하게 더 계속해야 할 것이다. 한국 혼자 협상타결의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관세화의무는 합의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a 송기호 변호사.

송기호 변호사. ⓒ 김영균

중규모 무역국가인 우리에게 세계무역기구는 중요하다. 그러나 농업 또한 중요하다. "WTO냐? 농업이냐?"라는 물음은 한국에서만 통용하는 허구이다. 앞에서 본 세 유령도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우상이다.

2000년 중국과 체결한 마늘협정, 그리고 지금의 우리농산물 학교 급식 지원 조례 저지, 그리고 쌀 협상에 이르도록 통상 관료주의는 농업에 큰 폐해를 주고 있다. 국회가 헌법이 보장한 사전 동의권을 내실 있게 행사하길 기대한다. 조약 심사처 등을 설치하여, 주요 조약에 대한 사전적 심사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운 가을 들녘이 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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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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