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헌법'이라는 난데없는 홍두깨를 보고

등록 2004.10.22 11:33수정 2004.10.24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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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사건 심판에서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헌법 위반' 결정을 내렸다.

위헌 결정의 주요 논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수도 서울'은 '관습헌법'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모름지기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이 존재하므로 수도를 옮기려면 개헌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재의 결정을 접하는 순간 나는 난데없는 홍두깨로 한 방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관습헌법이라는 생소한 말을 들으며 '난데없는 홍두깨'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이를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관습헌법이라는 말은 들어보지를 못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인식을 안고 살아오면서도 그게 관습헌법에 속하는 것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게 물론 법에는 문외한인 까닭이겠지만, 법에 밝은 사람들일지라도, 또 행정수도 이전을 극구 반대하는 일부 서울시민들 중에도 수도 서울이 관습헌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산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많은 사람이 알지 못했던 사항이 어떻게 관습이 되는 걸까? 관습도 자신이 일찍이 인지하고 있는 것일 때 관습의 의미나 가치가 성립되는 것 아닐까?

헌재의 결정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노회한 재판관들이 크게 고민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관습헌법이라는 이상한 법리와 그것에 따르는 논리들에 대한 설명만이 장황하게 이어질 뿐이다.

헌재의 대다수 재판관들은 지난 7월 12일 헌법 소원을 접수한 날로부터 꽤 이른 시기에 관습헌법이라는 홍두깨를 쉽사리 찾아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로지 그 홍두깨를 갈고 다듬는 쪽으로만 전력 투구를 한 것 같다.

관습을 좋아하며 일찍이 몸에 밴 관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관습의 산물인 홍두깨를 찾아냈다는 것은 필연이요 당연지사이기도 하면서 재미있는 상징성을 지니는 일일 것도 같다.

아무튼 그들은 관습헌법이라는 홍두깨를 손에 쥐게 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도 갖게 된 것 같다. 심리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사건이 접수된 지 3개월 10여일만에 서둘러 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그만큼 관습헌법이라는 홍두깨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한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지난 7월 12일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의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이 제기될 때부터 그게 과연 헌법과 관계되는 사항이며 헌법재판소에서 다룰 사안인가라는 강한 의문을 가져왔다. 헌재가 '이것은 헌재 심리 사안이 아니라'는 각하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물론 그런 기대가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생각으로 불안감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헌재의 재판관들이 대부분 서울이기주의와 연결되는 기득권적 관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 5월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어느 정도 전향적인 태도를 상기하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의 행정수도 헌법소원 결정에도 참으로 심도 있는 고민을 해주기를 바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뜻밖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예상하기도 했던 이번 결정을 보면서 역시 우리나라엔 아직도 홍두깨의 위력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헌재 대다수 재판관들은 쉽게 찾아낸 관습헌법이라는 홍두깨를 갈고 다듬는 쪽으로만 몰두했지 전혀 포괄적인 시야를 갖지 못했다.

그저 케케묵은 홍두깨와 관계되는 법리만을 찾아서 장황하게 제시할 뿐(관습헌법을 성문법의 법리에 맞추어 설명하려니 얼마나 장황하고 억지스럽겠는가) 신행정수도 건설이 우리나라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포괄적인 고민 사항은 전혀 언급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나라 최고 법률가라는 사람들의 철학부재와 천박성을 느끼며 일말의 연민과 비애를 갖는다. 비록 위헌 여부만을 가리는 것이 헌재 역할의 요체이긴 하지만, 적어도 헌법소원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다룰 적에는 마땅히 포괄적이고 철학적인 고뇌를 동반해야 하고, 또 그 정도의 자질은 지녀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은 대단히 정치적인 결정을 했다. 관습헌법이라는 난데없는 케케묵은 홍두깨를 휘둘러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 나라의 진로에 큰 위해를 끼쳤다.

그 홍두깨의 출현에 의한 논란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참으로 무성해질 것이고, 이 과도기를 지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오늘의 헌재 결정은 하나의 우스개로 남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호하고도 불확실한 관습헌법을 현실법으로 실재화시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관습헌법이 설령 존재하며 가치를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성문법의 눈으로 해석하고 성문헌법의 우위에 놓으려는 행위가 과연 온당한 일일까?

이제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모순의 구렁과 불합리의 덫을 안게 되고 말았다. 거기에서 또 많은 홍두깨들이 이런저런 일에 갖가지 모양으로 출현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유형무형의 홍두깨들은 결국 노무현 정권에 더욱 큰 짐이 될 것이다. 그 홍두깨 짐 역시 우리나라의 전진을 훼방하는 수구 세력에게는 일시적으로 축배가 될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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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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