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 소풍은 무조건 공릉이야"

초등학교 시절 소풍은 공릉이 전부였습니다

등록 2004.10.25 11:13수정 2004.10.2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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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화려한 단풍이 펼쳐진 영릉 산책길.

화려한 단풍이 펼쳐진 영릉 산책길. ⓒ 한성희

이곳에서 자란 사람은 소풍이라면 무조건 공릉을 떠올린다. 다른 곳은 생각할 수도 없고 소풍은 곧 공릉이다.

"봉일천 초등학교 소풍 공식은?"
"봄=공릉, 가을=공릉."


물통과 김밥과 삶은 계란, 미지근한 사이다 한 병을 배낭에 넣고 짝꿍이랑 둘씩 손잡고 줄을 서서 통일로를 건너 마을길을 택해 공릉까지 걸어 소풍가는 길이 초등학교 시절 소풍의 한결같은 그림이었다. 공릉이 소풍 장소라고 결정되면 '또 공릉이야?' 불만에 찬 목소리가 교실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리고 체념했다.

그 정도로 줄기차게 소풍을 다닌 곳이 공릉이다. 초등학교 봄·가을 소풍 12번 중 11번을 공릉으로 갔으니 지겹기도 했다. 6학년 가을 소풍은 수학여행으로 대신해서 11번이 되는 셈이다.

관광버스를 타고 공릉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6학년 수학여행을 봄부터 고대했던 나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서 그나마 가지도 못했던 쓰라린 기억이 남아 있으니 내 초등학교 시절의 소풍은 공릉이 전부였다.

소풍을 갔습니다
나무 도시락에 싼 김밥 신문지 냄새 풍기며
둘러멘 가방에서 찐 계란이 찌그러지며
긴 양말 둘둘 말아 내리고 멜빵 주름치마에
배 내밀고 찍은 흑백사진
소풍을 공릉으로만 다녔습니다

이름 쓴 감색 운동화에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
학년별로 줄을 서서 소풍을 갔습니다
내 기억 어디엔가
봄가을
일 학년 삼 학년 오 학년 육 학년도
줄을 서서
물통 둘러메고 걸어간 봉일천 초등학교 소풍이 있습니다


- '공릉 가는 길', 앞 일부, 한성희


요즘 공릉에 소풍을 오는 초등학생들의 점심 도시락을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음료수와 김밥이나 유부초밥 도시락 정도다. 과자나 과일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오는 어린이도 없다.


따라오는 부모님이나 할머니도 없이 전세 버스를 타고 선생님과 가볍게 도시락만 들고 온다. 소풍 때 바리바리 싸들고 낑낑대며 들고 따라오는 부모님이 없는 것은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왠지 소풍답지 않다.

a "보물찾기 시작!" 선생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숲으로 뛰는 어린이들.

"보물찾기 시작!" 선생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숲으로 뛰는 어린이들. ⓒ 한성희

할머니가 김밥과 케이크, 찐 달걀, 과일, 과자, 오렌지색 환타 한 병을 싼 점심보따리를 들고 공릉으로 따라와 점심을 먹던 기억을 가진 나 역시 소풍을 혼자 다니기 시작한 건 5학년 이후였다.

공릉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해서 단 한 번도 찾은 기억이 없다. 원래 멍청한 편이라 보물찾기 같은 데는 찾는 재주도 없고, 경품 같은 것도 운도 없어 둘이 심지를 뽑아도 안 뽑히는 불운을 타고나기도 했다.

a 보물이 어디 숨어 있지?

보물이 어디 숨어 있지? ⓒ 한성희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가자 1학년 봄 소풍이 또 공릉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학교에서 출발하는 대신 공릉 앞에서 9시까지 집합하라는 것일 뿐. 소풍 공식이 '봄=공릉, 가을=장릉'으로 바뀐 차이였다. 3년을 또 줄기차게 공릉과 장릉으로 소풍을 다녔다. 파주시에서 자란 사람치고 공릉으로 한 번 정도 소풍 안 다녀본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서울로 고등학교를 진학하자 이번엔 소풍 장소가 서오릉과 서삼릉으로 정해졌다. 무려 9년을 소풍 다닌 공릉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기도 했고, 소풍이 마음 설레는 날이라는 생각은 바랜 기억으로 물러가 버린 시건방진 때이기도 했다. 그저 김밥이나 먹고 하루 때우고 모처럼 일찍 끝나서 친구들하고 몰려다닐 생각에 더 기대가 컸던 나이가 고교 시절이다.

그러나 공릉 소풍의 질긴 인연은 서울로 도망갔다고 끊어지지 않았다. 3학년 1학기던가? 종례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더니 소풍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다고 알렸다.

"봄 소풍은 이번 토요일에 공릉으로 간다."
"공릉이 어디예요?"

일제히 물을 때만 해도 그 공릉이 이 공릉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설마 또 그 지겹게 다니던 공릉이 아니겠지. 서울로 유학(?)까지 와서 또 공릉으로 소풍을 간다니?

"파주에 있는 공릉이다."
(헉.)
"아참, 거기 반장네 동네지? 장소와 가는 방법은 반장에게 알아보도록."

세상에 이럴 수가. 학교에서 결정한 것이니 별 수 없었지만 불만에 가득 찬 내 심정도 모르고 모처럼 서울을 떠나 소풍을 간다고 반 친구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불광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공릉 앞에서 내려 몇 분만 걸으면 된다고 알려주는 내게 친구들은 한 술 더 떠서 소풍 끝나고 우리 집으로 놀러가자고 자기들끼리 계획 짜고 신이 나서 난리였다. 공릉으로 가는 것만도 기가 막힌 판인데 저 수십 명의 말괄량이들이 전부 우리 집으로 몰려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시골집에 가보는 것이 서울내기들의 꿈이고 낭만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농사와 거리가 먼 집이었으니 친구들이 기대하던 농사짓는 시골집과는 그림이 영 달랐다. 친구들을 설득해서 집에 오지 못하게 했는지 우리 집으로 다 끌고 갔는지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서울까지 도망갔어도 벗어나지 못한 공릉 소풍과 끈질긴 인연을 맺은 그 공릉에 해설사로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 됐는데, 공릉에 들어설 때마다 짝꿍이랑 둘씩 손잡고 먼지 나는 길을 걸어오던 그리운 기억을 되새긴다. 가을 소풍철이라 많은 아이들이 이곳에 소풍을 온다.

단골메뉴였던 보물찾기를 하는 것은 유치원생들이고 요즘 초등학생들이 보물찾기하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대신 현장학습이라 해서 메모장과 필기도구를 들고 안내판 앞에 서서 메모를 하거나 문화재 해설을 듣는다.

질문과 메모할 것이 대충 끝나면 우르르 개울로 몰려가거나 숲으로 들어가서 뛰기에 바쁜, 기운이 펄펄한 아이들의 모습은 도시에 갇혀 있다가 모처럼 자연 속에서 생기에 가득 차서 즐겁다.

다른 아이들이 다 흩어진 뒤에도 유난히 질문이 많던 5학년 여자애가 남아 있었다.

"선생님 설명 들으니 너무 재미있어요. 더 해주시면 안돼요?"
"그럴까?"
"영릉은 다 들었으니까 순릉으로 직접 가서 설명해 주세요."

야무지기도 하고 똑똑하게 생긴 여자애 이름은 한지연이다. 서울 은평구에서 소풍을 왔는데 할아버지에게 들었다면서 공릉과 순릉에 대한 역사를 제법 자세히 알고 있기도 했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을 보면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지라 뭘 가르쳐달라면 군말 않고 응하는 선생 기질이 저절로 나온다. 역사에 대한 의식도 많이 달라져 단순히 시험을 위한 지겨운 공부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지연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도 같은 호기심과 재미를 느낄까?

a 공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차량들.

공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차량들. ⓒ 한성희

얼마 전에 수십 년간 수능을 위한 국사만 가르쳐왔다는 교사가 와서 석물과 능의 구조와 역사에 대한 해설을 듣고 진지하게 질문도 많이 하고 메모도 열심히 하더니 한탄하던 생각이 난다.

"내가 국사만 20년을 가르쳤고 다 합치면 평생동안 40년을 공부한 셈인데 여기서 듣는 역사는 다 처음 듣는 것이고 배울 것이 너무 많으니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수능을 위한 국사만 가르쳐 온 것이 잘못 공부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 왕릉 해설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라는 얘기다. 그 교사에게 왕릉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야라고 했지만 수능을 위한 공부만 가르쳐왔다는 말은 여러 가지 생각을 남겨주었다.

이제야 말갛게 비치는 엷은 초록의 숲을 봅니다
굵은 나무 컴컴한 숲
능지기 눈을 피해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닌
큰오빠의 길은 배가 고파 나무둥치 타고 올라가
하얀 깃이 선명했던 학이 낳은 네 개의 알에서
두 개를 꺼내 먹던 대낮에도 어두운 공릉 숲의 길
다시 대머리처럼 비워진 길이 기억합니다

소풍을 갔습니다 공릉으로
찌그러진 나무 벤또에 담긴 터진 김밥 먹으러
되돌아보자 살아나는
학의 알 껍질 밟고
이제 소풍을 갑니다

- '공릉 가는 길' 나머지 부분


70년 사적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공릉은 방치됐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공릉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적이 방치 됐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나무들은 도벌꾼에게 잘려나갔고 정자각도 폭격에 무너진 것이 많았다.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시작한 이후 숲이 되살아나고 정자각과 비각 등도 보수했다. '내 무덤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마라' 명한 세조의 광릉이 훌륭한 수목원으로 남아 있는 것은 수백 년간 지속적인 관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는 도벌이 사라지는 대신 새로운 무기가 나타나 숲을 위협하고 있다. 교통량 증가로 대기오염물질이 방출돼 고사목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수백 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져가는구나, 하는 한탄을 한 적이 있다.

a 순릉 홍살문과 노란 단풍이 가을 하늘 아래 조화를 이룬다.

순릉 홍살문과 노란 단풍이 가을 하늘 아래 조화를 이룬다. ⓒ 한성희

공릉도 다르지 않다. 다시 푸른 숲으로 우거진 공릉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도로 때문에 공해와 먼지에 시달리고 있다. 800m 이 도로는 공릉과 순영릉을 둘로 갈라버려 문화재가 분리되는 기현상을 이루고 있으며 도로 옆에 있어 먼지에 시달리는 공릉은 관람객들에게 외면 받고 공해에 시들어가고 있다.

이 도로 문제는 공릉의 가장 큰 골칫거리다. 우회하는 포장 도로가 있음에도 먼지 나는 비포장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들도 문제지만 공릉관리소에서도 없앨 수가 없으니 골머리를 앓는다. 도로를 포장해달라는 요구까지 있으니 인근 주민들의 이기적인 욕심은 끝도 없다.

이 도로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해설사들와 파주 문인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 중이다. 하루 정도 도로를 막고 캠페인을 벌이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시 낭송회를 개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과 시민단체와 힘을 합쳐서 하자는 의견, 공릉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서명을 받자는 의견 등이 있다.

광릉 짝이 나지 않으려면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도로 없애기 운동을 시작해야겠다는 것이 공릉 가족들과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소풍 와서 푸른 숲에서 뛰어 노는 풍경을 계속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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