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열린 소녀왕비 기신제

공릉의 가을이 깊었습니다

등록 2004.10.20 06:18수정 2004.10.2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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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가을 냄새가 공기 중에서 물씬 난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으면서 이렇게 세월이 또 가는구나 하는 실감을 한다. 올해는 추석이 일러서 그런지 추석 무렵만 해도 가을 냄새가 날 듯 말 듯했다. 차가운 공기와 나뭇잎 물드는 냄새가 어우러져 쓸쓸하면서도 익숙한 향수를 자극하는 가을 특유의 냄새를 해마다 맡곤 했다. 아, 가을냄새가 난다.

a 공릉 개울가의 단풍이 곱게 들었다.

공릉 개울가의 단풍이 곱게 들었다. ⓒ 한성희

요즘 공릉으로 들어서면 입구부터 노랑 빨강으로 현란한 단풍과 붉은 열매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을 호사시키고 숲에서 살랑대는 가을냄새가 몸서리치게 가을을 자각하게 한다.


공릉 관리사무소 옆에는 커다란 밤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청설모들이 밤이 익으면 즐겨 찾는 밤나무다. 창설모는 먼저 밤송이를 떨어트린 다음 내려와서 까먹는 습관이 있다. 밤송이가 벌어질 무렵부터 청설모와 공릉 관리사무실 사람들은 짓궂은 게임을 즐긴다.

밤송이를 떨어트린 청설모가 내려와서 까먹으려는 찰나 쏜살같이 쫓아가면 다급한 청설모는 밤송이를 물고 후닥닥 도망간다. 청설모는 무거운 밤송이를 물고 도망가는 것이 버거워 이내 떨어트리고 만다. 이것을 주워오면 밤을 빼앗긴 청설모는 나무 뒤에서 씩씩대면서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내밀며 분해서 어쩔 줄 모른다. 공릉 가족들과 청설모의 밤을 빼앗기 게임도 이제는 철이 지났다.

지난 일요일(17일)에 올해 마지막 제례인 공릉의 장순왕후 기신제가 열렸다. 5월에 순릉 공혜왕후 기신제를 시작으로 9월에 영릉 기신제가 있고 마지막으로 장순왕후의 기신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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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님의 제사는 어떻게 지낼까?

지난 번 영릉 기신제를 봤기 때문에 이번엔 그리 호기심이 크지 않았다. 공릉 기신제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서울지원 서대문분원(분원장 이동보)에서 맡아서 지낸다. 기신제를 지내는 절차는 지난 번과 다르지 않다. 대동종약원에서 제물을 만들어 보내기 때문에 제물도 같다.

a 촛불이 꺼진 제사상. 앞의 삼발이 잔이 제주를 담는 임금님 술잔이다.

촛불이 꺼진 제사상. 앞의 삼발이 잔이 제주를 담는 임금님 술잔이다. ⓒ 한성희

사진을 찍으려고 정자각 가까이 다가갔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제상의 노란 초에 불이 켜 있지 않은 것이다. 영릉 기신제에선 분명히 불이 켜졌는데 왜 켜지 않았을까? 기신제가 끝난 후에 제관에게 물어봤다.


"그건 말이죠. 촛불은 켰지만 바람이 불어서 꺼진 거예요. 꺼진 촛불은 다시 켜지 않습니다."

일년에 한 번 열리는 비각의 문이 활짝 열리고 <조선국 장순왕후능>이라고 새긴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능의 제례는 초헌관은 왕이나 판서 이상의 관리가 맡고 아헌관은 세자가 맡았으나 지금은 초헌관은 시장이나 군수 등 지자체단체장 또는 전주 이씨 종중에서 맡고 아헌관은 왕비의 친정 가문의 한 사람이 맡는다.


촛불이 꺼진 장순왕후의 기신제는 왠지 쓸쓸해 보였다. 540년 전 죽은 소녀 왕비의 제사라서 그럴까? 가을냄새가 짙게 풍기는 계절이라 그럴까? 세종대왕 기신제는 대통령까지 참석한 적도 있다던데….

영릉 기신제와 달리 장순왕후 기신제의 제주는 백화수복을 썼기에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제주는 능 기신제를 맡고 있는 분원에서 준비하기에 직접 빚기도 하고 사다 쓰기도 하나 보다.

a 문이 활짝 열린 비각.

문이 활짝 열린 비각. ⓒ 한성희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한명회의 몇째 딸인가에 대해 가끔 해설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왕조실록에는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가 차녀(次女)라고 나와 있어서 그렇다면 장순왕후가 맏딸이 아니냐고 설왕설래가 오갔다. 하지만 왕조실록엔 장순왕후가 맏딸이라고 나오지 않는다.

이 격론은 계속됐지만 청주 한씨 종중에서 방문했을 때 족보에 셋째 딸과 넷째 딸이라고 적혀 있다고 밝혀줌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가끔 차녀가 아니냐고 묻는 관람객도 있어서 족보에 나온 것을 채택했노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왕릉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정사를 근거로 해설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소문도 가끔 들린다. 동구릉, 세종대왕릉, 홍유릉, 융건릉, 공·순·영릉에 현재 37명의 문화유산해설사가 활동 중이다. 왕릉에 대한 해설을 하다보면 조선역사가 총동원 되야 하는 경우도 많고, 겉보기엔 같아 보여도 왕릉의 석물 구조도 왕이 재위하고 죽은 시대의 미묘한 갈등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 어려운 일이다.

a '조선국장순왕후능' 비

'조선국장순왕후능' 비 ⓒ 한성희

관람객들에게 문화재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활동하는 해설사가 근거 없는 야사나 야담을 해설할 경우, 관람객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는 일이 되고 학계나 사학자의 비난을 받는 일도 있다. 이는 지구관리소에 갖춘 전문자료가 미비해서 해설사들에게 충분한 자료제공과 소양교육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조선왕릉의 기본 능제와 국장제도와 상설도에 관한 전문자료는 '高麗·朝鮮陵誌 (고려·조선릉지)'(목을수 저) 외에는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연재를 하면서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목을수 선생님과 공릉관리소 측에 거듭 감사 드린다.

요즘 공릉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조선왕릉 능제에 대해 해설을 끝내고 나면 여러 능을 찾아도 이런 해설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알게 되어 고맙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조선왕릉은 많은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찾는데 간단하게 '누가 묻힌 무덤이다' 정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수백 년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현장인 왕릉을 찾아와 문화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간다면 많은 시민들이 만족할 것이다.

a 순릉 낙엽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순릉 낙엽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 ⓒ 한성희

가을 냄새가 서러울 정도로 쓸쓸한 가을날의 소녀왕비 기신제가 끝나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져 좋아하는 순릉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 정신없이 풀을 먹는 다람쥐의 엽기적인 포즈.

정신없이 풀을 먹는 다람쥐의 엽기적인 포즈. ⓒ 한성희

여뀌가 만발하던 개울가에 가보니 다람쥐가 풀을 씹어먹고 있다. 다람쥐가 풀도 먹나? 신기해서 한참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 아예 풀줄기를 잡고 일어서서 우스꽝스런 포즈를 잡은 채 먹느라고 정신없다. 언제 보아도 다람쥐는 귀엽다. 다람쥐가 카메라에 요즘 들어 잘 잡히는 건 먹는데 정신 팔고 있을 때가 많아서다.

숲길엔 여기 저기 산밤송이가 떨어져 흩어져 있고 도토리도 많이 떨어져 뒹군다. 어느덧 밤이나 도토리가 떨어지는 계절도 지나가고 있다.

40여만 평의 넓은 숲은 개방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화재가 날 시에는 소방차가 들어갈 수 있거나, 숲을 관리하기 위해 병든 나무를 베어내고 식목을 하기 위한 경운기나 트럭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능선을 따라 나 있다.

대개 능선까지는 가지 않지만 능의 사초지 잔디를 키우는 잔디밭 옆길을 따라 소나무 숲이 있는 곳까지 가면서 나만의 숲 속 정원은 잘 있는지 살핀다. 이끼 정원, 폐허의 황야 정원, 난초 정원, 양치류 정원 등등 내 멋대로 붙인 이름들이지만 여름부터 살펴보던 숲의 백미들이다. 아직은 제 모습을 다 잃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 오면 얼마나 변했을지?

a 두 나무가 하나로 얽힌 공릉 숲의 '연인 소나무'.

두 나무가 하나로 얽힌 공릉 숲의 '연인 소나무'. ⓒ 한성희

뱀이 발목을 콱 물까봐 겁이 나서 길을 벗어나지 않고 숲길 옆에 있는 정원들을 감상하며 걷는다. 계절이 바뀌니 정원들도 차츰 모습이 변한다. 잎이 떨어지면서 휑하니 비어 가는 숲을 보면 서운한 마음이다. 숲을 한 바퀴 돌 때마다 허무한 가을냄새가 점점 짙게 다가온다.

참나무 낙엽이 수북히 깔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사방에서 휘몰아 떨어지며 갈색 가을의 음악를 연주한다. 사방에 다람쥐와 청설모가 먹을 도토리가 흔하니 식량걱정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벌레 먹은 밤과 도토리가 많다.

숲을 시민들에게 개방해야 할지 말지 고민중이라는 얘기를 들어 능선에 올라 한 바퀴 둘러봤다. 시민들에게 숲을 개방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산에 오르면서 사방을 둘러보자 여기저기 병든 나무를 베어낸 것이 눈에 보인다. 적은 인원으로 숲을 관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해설사들도 능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몰래 숲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눈에 띄는 대로 제지하지만 역부족이다.

몰래 숲에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불미스런 소문이 항상 끊이지 않고 숲에 내버리고 가는 쓰레기를 줍는 일도 관리하는 사람들 몫이다. 숲을 둘러보니 목재로 된 정자각과 붙어 있는 숲의 화재 위험은 어찌해야 할지 걱정스럽다. 파주시에는 곳곳에 시민들이 오르는 산이 많아서 굳이 이곳 숲까지 공개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본다.

a 유적지에 내걸리는 이런 플래카드가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

유적지에 내걸리는 이런 플래카드가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 ⓒ 한성희

금지하고 있음에도 약초나 버섯을 채취한다고 씨를 말려버리는 일이 지금도 종종 있고, 가을이면 아예 차떼기로 몰려와서 도토리를 주워 나르는 몰지각한 사람도 많은데 개방하게 된다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 지. 숲의 동물가족 먹이까지 싹쓸이 해서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아 피난보따리 싸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우울한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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