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놈의 능만 보면 속이 끓는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등록 2004.10.12 10:16수정 2004.10.2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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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문화재청장인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남도답사 1번지에서 지리산 휴게소를 들러 지리산에 대한 감흥을 쓴 글이 있다. 무슨 전승 내지는 참전, 반공 기념탑을 보자 지리산의 현대사를 떠올리며 김지하 시인의 시 '지리산'을 읊었다고 한다.

저 놈의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다시 확인해보니 그 싯귀가 아니고 '눈 덮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였는데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저 놈의 전승탑만 보면 피가 끓는다'가 본인이 읊고 싶어했던 구절이라 한다.

그 심정이 장릉을 보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인조의 장릉을 보면 이 말이 하고 싶다.

저 놈의 능만 보면
속이 끓는다


a 인조와 인열왕후 합장릉인 장릉의 정자각

인조와 인열왕후 합장릉인 장릉의 정자각 ⓒ 한성희

광해군 같은 군주라면 세습왕조의 임금이라도 멋진 통치자라고 인정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조선 왕조에서 제왕다운 왕이 몇 명이나 될까? 시대적인 정치환경이 다르니 사람마다 꼽는 기준이 다르겠지만 광해군만큼 매력 있고 군주다운 군주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광해군은 고독한 개혁군주다. 임진왜란을 맞자 갑자기 세자로 인정돼 도망쳐 숨기에 바빴던 선조와는 달리 귀한 왕세자의 몸으로 전쟁의 복판에 뛰어들어 백성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전쟁을 몸소 체험한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광해군의 인기는 선조를 제치고 치솟아 시쳇말로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


쪼잔한 아버지인 선조는 아들 광해군의 폭발적인 인기에 불안감을 느낀다. 선조는 말하자면 백성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임금이고, 광해군은 전쟁의 회오리에서 백성과 함께 나라를 지킨 왕자니 민심이 광해군에게 쏠린 것은 자연스럽다.

14대 왕인 선조는 명종이 자녀를 남기지 않고 죽어서 조선 최초로 왕비가 출생하지 않은 방계 승통의 왕이다. 선조가 종(宗)이 아닌 조(祖)를 얻어 쓰게 된 것도 방계 승통이기 때문이다. 죽은 당시에는 선종이라 했지만(실세 아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조라고 우길 간 큰 신하는 없다) 후에 광해군 8년 선종(宣宗)에서 선조(宣祖)로 개정됐다.


정실 출신의 자식과 첩의 자식이 하늘과 땅 차이로 차별 받던 서슬 퍼런 신분 시대에 제왕이 최초의 후궁 출신 손자라면 그 콤플렉스는 극을 치달을 것. 선조는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낳은 덕흥 대원군(아들 선조가 왕이 되는 바람에 대원군이 됐다)의 3째 아들이다.

a 수백년 묵은 장릉 입구의 아름드리 참나무는 무심하게 서 있다.

수백년 묵은 장릉 입구의 아름드리 참나무는 무심하게 서 있다. ⓒ 한성희

당시 선조는 후궁 출신 방계라는 심리적인 열등감과 임진왜란을 당한 왕으로 체면은 밑바닥에 처박혀 구겨졌고 왕비 몸에서는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떠오르는 스타 광해군마저 후궁 출신이고 약 먹은 닭처럼 힘없던 선조는 이래저래 터지는 울화를 다스릴 곳이 없었다.

다 늙어서 인목대비에게 장가들어 얻은 늦둥이 영창대군이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였지만 권력의 판도는 정해졌는데도 선조가 어리버리하게 '영창대군 잘 돌봐달라'고 신하들에게 공공연히 떠든 대가가 후에 비극으로 나타난다. 광해군 파와 영창대군 파로 패가 나뉘어서 붕당의 명분을 제공했고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비극이 예정되는 엄청난 결과만 가져온다.

선조가 얼마나 이빨 빠진 호랑이었는 지를 증명하는 건 선조33년 6월 27일 의인왕후가 죽자 신권(臣權)에 휘둘린 능 택지 과정에서 나타난다. 전쟁을 겪으면 사회의식이 달라지는 건 인류역사의 본질이다. 초기의 왕권 신성불가침의 시대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신권의 반란 때문에 5개월 이내에 결정되고 장례를 마치던 능 택지가 질질 끈다.

죽고 사는 건 왕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다는 경험을 임진왜란을 통해 뼈저리게 겪었던 신권은 간이 붓는다. 자신의 선산명당이 택지로 결정되면 이장해야 하는 신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정하지 못하고 의인왕후의 장례는 5개월 이내였던 과거의 관습을 깨고 7개월 만에 겨우 얼렁뚱땅 묻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파주시의 대표적인 명당으로 꼽히는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이 왕릉택지에서 피하게 된 일화는 그것을 증명해준다. 파평 윤씨 가문에 지금도 내려오는 일화는 왕릉택지로 거론 될 때마다 ‘왕릉은 1백 개의 골짜기가 있어야 하나 이곳은 1백 개가 못됩니다’라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핑계로 능이 되는 것을 피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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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6대 왕인 인조(1595-1649)는 남한산성의 굴욕적인 무릎꿇기로 역사에 치욕을 남긴 왕이다. 힘이 없어서 전쟁에 지는 거고 항복하는 거야 약소국의 운명이니 그것만으로 인조를 욕할 건 없다. 하지만 인조는 광해군(1608-1623)을 정통(?) 쿠데타로 몰아내고 등극한 왕이다. 그리고 스스로 전쟁을 불러들인 왕이라 하면 심한 걸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와 화통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들이 친명파였고 광해군의 뛰어난 외교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국가의 안정을 기했던 조선은 인조 등극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명의 은공을 저버리고 오랑캐와 친했다고 쿠데타의 명분을 내세웠던 인조반정은 청에 대해서 인조의 남한산성의 치욕과 함께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기에 이른다.

만약,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약, 광해군이 쿠데타로 실권하지 않았더라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외척들에 의한 문란한 세도정치로 조선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연산군의 폭정에 정당한 명분을 가진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때부터 절대 왕권국가였던 조선왕조의 왕권은 흔들리고 신권이 목소리가 커진다. 한 번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자 맛이 들린 신권은 호시탐탐 명분을 만들어 맘에 안 드는 왕을 내쫓고 정권을 잡으려는 습관이 들린 거다. 그 희생양이 광해군이다.

중종반정 이후 쿠데타에 맛이 단단히 들린 신권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경제를 살리고 백성을 남의 나라 전쟁에 보내 죽이지 않고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며 국력을 회복하는 등 멀쩡하게 정치를 잘 하는 광해군을 내쫓았다. 불과 얼마 전 군사쿠데타를 수 차례 우리가 겪었던 과정과 똑같다.

내 사랑, 광해군이여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였다(하지만 영창대군은 광해군이 죽인 것은 아니다)는 폐모살제와, 선조가 지성으로 섬기던 명의 은공에 등 돌리고 오랑캐와 화친했다는 등 36가지 죄목을 들어 쿠데타를 합리화한다.

임진왜란 때 도와줬다는 이유를 내걸고 수십 년간 툭 하면 은혜를 알라며 후금과의 전쟁에 파병요청을 해온 명에게 광해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끌다가, 떠오르는 태양인 후금과 밀약을 한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에 겪은 경험을 발휘해 정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강홍립으로 하여금 짜고 치는 고스톱을 연출한다.

아끼는 조선 군사를 잃기 싫고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후금의 힘을 파악한 광해군의 혜안이 돋보이는 멋진 첩보전이다. 광해군의 기록을 읽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로 내가 '광해군 폐인'이 된 부분은 강홍립 건과 허준의 동의보감 편찬 기록이다.

지긋지긋한 사대주의 병에 걸린(요즘도 그 병은 멸종 않고 유행한다) 신하들이 오랑캐에 항복한 강홍립을 벌주자고 쉴 새 없이 들들 볶지만 광해군은 의연하게 뿌리친다. 어의였던 허준에게 선조가 죽은 죄를 들어 죽이자고 벌주자고 계속 들고 일어나는 것도 광해군이 감싸고 보호했기에 불후의 의학명저 '동의보감'이 탄생한 것이다.

임진왜란 후에 조선의 경제는 곤두박질친다. 조선의 경제력 바탕은 농업이다. 농경사회의 기본요건은 노동력과 토지다. 전쟁을 겪자 농지는 70% 이상이 줄어들었고 경제부흥을 위한 노동력인 인구가 급격히 감소됐다.

병이 창궐해서 국가 경제력의 바탕인 백성이 죽어 가면 아쉬운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의학보급이라는 걸 광해군은 파악한 것이다. 들들 볶는 명분론자들에게 밀려 마지못해 보낸 유배지에서 허준이 약초연구를 위해 나돌아 다니는 것을 트집 잡는 신하들의 떠드는 소리도 무시하고 1년 만에 허준을 풀어주고 동의보감을 완성하게 한 왕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강홍립 사건을 보면 로버트 김이 생각난다.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인재는 온몸으로 막아주고 보호하는 멋진 남자가 광해군이다. 이 정도는 돼야 제왕감이지.

당파 싸움에 호시탐탐 정권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서인들이 들고 있는 첫 번째 대의명분은 광해군이 후금인 오랑캐와 화친했다는 것인데 명나라에 고개 숙이고 아부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고 사대의 예를 갖추게 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렇게 사대주의에 목을 맸던 서인들이 명에게 아부하고 굽실대면서 쿠데타의 명분을 임진왜란에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렸다고 내세우고 있으나 정작 당시 명의 기록은 인조반정을 '찬탈'로 규정지었다는 걸 알고나 있는지?

명이 인조를 인정한 건 순전히 자기의 이득 때문이었다. 날이 갈수록 후금의 기세는 등등하고 황혼길에 접어든 명으로서는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파병을 요구하려면 인조를 인정할 수밖에 더 있는가.

인조와 반정세력의 꼬락서니를 보면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미국에 인정받으러 당선되면 줄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미국이 50년도 넘은 옛날 한국전쟁에서 파병한 은혜를 줄기차게 우려먹는 것도 명과 복사판이고, 서인이 명의 은혜를 저버렸다고 광해군을 몰아낸 여론몰이도 성조기 흔들며 '미국이여 영원하소서' 떠받드는 놀음판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나라를 재건하고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와 조약을 맺고 신성강대국으로 부상하는 후금과 밀약을 하면서 노련하게 전쟁의 위협을 피했던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는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고 죄를 묻고 있다.

광해군은 7년 임진왜란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려 파주 교하로 수도를 천도하려 단행했으나 신하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했다. 당시 공납제의 폐단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자 광해군은 그 유명한 대동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집집마다 지방 특산물로 내던 것을 토지를 가진 사람에게만 쌀로 내라는 요지의 대동법은 조선의 세법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으로 큰 평가를 받는다.

대동법은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 경기도에만 시행됐지만 토지를 가진 당시 기득권의 반발은 거셌다. 그 후 대동법은 차츰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지만 100여 년의 세월이 걸린다. 선각자는 사방에 적을 둔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기득권의 아집과 정권야욕은 광해군을 쿠데타로 내몰기에 이르며 백성들을 전쟁과 곤궁 속으로 빠트리게 한다. 장릉에 올라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지금 정치 현실을 보면 다시 광해군이 그리워지는 것은 개인적인 감상만은 아니다.

인조는 83년 후 영조의 천장으로 명당에 자리잡고 깊이 잠들어 있지만 인조반정으로 조선백성들이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고 정치가 혼탁해진 책임은 면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광해군에게 폐모살제의 명분을 내세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청나라와 친했다는 이유로 내쫓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무엇으로 합리화할 것인가?

국제정세에 어두운 인조의 실책은 광해군을 몰아내서 전쟁을 불러온 것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를 독살함으로써 조선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기회를 놓치기에 이른다. 이후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 효종은 북벌의 의지를 불태우다가 춘추 41세로 갑자기 승하했고 이 역시 청나라의 비위를 거스를 것을 염려했던 신하들에 의한 독살일 거란 의혹을 후대에 남겨놓았다. 명분 약한 쿠데타로 인해 전란을 불러일으키고 아들을 독살한 어리석은 군주의 인과응보라고 본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전제로, 효종의 북벌론이 불가한 것을 다시 짚어보려고 한다. 효종의 기개와 분노는 민족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정신을 높이 사지만 광해군의 눈길로 돌아본다면 어리석은 것이 보인다.

a 능을 지키는 석호는 제자리를 지키지만.

능을 지키는 석호는 제자리를 지키지만. ⓒ 한성희

북벌은 전쟁을 전제로 한다. 전쟁이란 소모전이고 경제력이 필수다. 농경사회였던 당시의 세계에서 임란과 호란을 겪고 경제력이 전쟁 전보다 1/3 이하 수준으로 추락한 조선이 소득 없이 무한정 자원과 인력을 퍼부어야 할 전쟁에서 대국 청을 정복할 군사력를 키워야 할 능력이 있었을까? 핵 같은 병기가 있는 시대도 아니니…. 광해군 같으면 백성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현명한 정책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과 같은 효종의 무모함과 청의 비위를 거스를 것에 두려움을 느낀 사대주의 신하들은 청에게 효종의 반역을 제보하고 제왕을 독살해버린다. 정권을 잡기 위해선 왕을 죽이고 나라 팔아먹고 아부하는 무슨 짓이던 다 하는 사대주의 기득권들이 쿠데타에 재미 들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입맛에 안 맞는 왕은 죽이고 실록을 왜곡하는 것이 관례화 됐다.

지금도 집권야욕에 무슨 짓이건 서슴지 않는 그 못된 습관이 남아 쪽수로 밀어붙이기가 있다. 일례를 든다면 머리 수 쌈으로 득의양양하게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걸고 대통령 내쫓으려고 탄핵을 서슴지 않는 실정을 불과 얼마 전에 겪지 않았는가.

a 장릉 숲의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의 모습은 굴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 주는 듯 싶다.

장릉 숲의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의 모습은 굴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 주는 듯 싶다. ⓒ 한성희

기득권에 연연해서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의 길을 걸은 펜은 언젠가는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다. 내가 해골로 남은 뒤에 누가 뭐라던 상관없고 내 하고 싶은 대로 살란다 하는 배짱 때문에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은 왜곡으로 얼룩졌지만 수백 년이 지나서도 당시 집권층의 이기적인 야욕으로 백성을 도탄에 몰아넣었던 역사는 기억되고 남아 있다.

어리석은 군주와 신하들이 저만 살자는 이기적인 기득권 쟁탈을 위해 정권다툼을 벌이면 배가 곯아터지고 등골이 휘는 것은 백성들이다. 현대의 위정자들이 뼈저린 반성과 함께 되돌아보아야할 역사의 진실이다.

정권야욕에 국민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우를 범하지 않을지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대다. 수백 년 전 왕릉에 서서 인조의 장릉을 바라보며 현재의 우리가 거듭 되새겨야 할 역사의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겪었으면서도 되풀이되는 정치권이 현재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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