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은 휴대폰이 안 터져!"

누룽지 같은 공릉의 낙엽 속에서

등록 2004.11.06 10:12수정 2004.11.13 13:11
0
원고료로 응원
a 누룽지 같은 낙엽이 깔린 공릉 가을.

누룽지 같은 낙엽이 깔린 공릉 가을. ⓒ 한성희

숲이 점점 비어간다. 나무들이 앙상한 팔을 드러내며 비어 가는 숲에는 낙엽이 바닥에 푹신하게 깔렸다. 붉고 노란 단풍잎도 아름답지만 나는 누런 참나무 낙엽이 좋다. 누룽지 같은 낙엽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북쪽나라에서는 누룽지 같은 가을만 있었습니다
나는 반투명한 새빨간 단풍잎을
꽂아 넣을 작은 시집조차 배낭에 넣지 못하고
떠난 단풍관광에
푸른 지폐 두어 장 든 지갑을 비워
차곡차곡 채웠습니다
(<내장산 우체국> 한성희, 일부)



햇솜을 둔 이불 같은 참나무 낙엽 위를 걸으면 왠지 낙엽이 아픈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 미안하다. 혼자 숲을 걸어도 낙엽들이 바스락바스락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 혼자라는 생각이 사라지진다.

소나무 낙엽이 깔린 숲으로 들어가면 발 아래 도란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고요해진다. 노란 솔잎 위에서 하늘을 보며 벌렁 눕고 싶은 충동마저 생길 정도로 아가 이불 같은 솔잎 낙엽은 포근하다.

순릉 숲에 들어가서 낙엽이 수다 떠는 바스락 소리에 홀려서 한바퀴를 돌 때까지도 휴대폰에 문자가 온 것을 몰랐다.

참, 이곳은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명당은 이름 값을 하는 것인지 여러 가지 이상한 일이 많다. 공릉은 01* 외엔 휴대폰 통화가 불가능하다. 주위에 특별히 높은 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곳에선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걸까.

일반 전화를 쓰려면 관리 사무실까지 가야 하므로 공릉에 올 때면 전화 걸려올 만한 곳에 미리 연락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공릉 가는 날이니까 전화 통화 불가능해. 문자는 들어 오니 전화 안 받거나 받아도 끊어지면 문자를 날리든지 좀 기다려."

파주시는 산도 많고 군사 지역이라 휴대폰이 안 터지는 곳이 더러 있긴 하다. 하지만 공릉의 전화 불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공릉 안에서는 안 터지는 전화가 불과 10여m 떨어진 정문 밖 주차장에서는 잘 통하는 것도 그렇고 공릉을 가로지르는 800m 도로 반대 편 하니랜드로 나가면 통화가 가능한 것도 아리송하다.


사무소 직원들은 인근의 미군 부대인 캠프하우즈의 레이더 때문에 안 된다고 한다. 그것도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데, 넓은 공릉 숲은 전화가 안되지만 미군 부대와 더 가까운 인근 모 연수원이나 주차장에서는 통화가 잘되기 때문이다. '명당은 휴대폰도 안 터진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a 공릉 숲은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고요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공릉 숲은 휴대폰이 터지지 않아 고요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 한성희

공릉 안이라고 해서 다 통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소 옆 참나무 옆에 찰싹 붙어 있으면 지지직거리면서도 겨우 통화가 된다. 그래서 쓰레기통 오른쪽, 순릉 입구 정가운데 같이 통화가 가능한 지역으로 전화기를 들고 쫓아 다니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곳에서 서너 걸음만 옮겨도 전화는 끊어져 버린다. 그러나 이나마도 공릉 입구 근처에서만 가능하다. 관리사무소 사람들은 능 순찰을 나갈 때면 아예 무전기를 들고 다닌다.

공릉 안으로 들어가면 벨도 전혀 울리지 않아, 연락할 일이 있는 사람들은 전화가 안되면 공릉에 갔으려니 짐작한다. 그래도 문자는 가능하다는 걸 몇 달 만에야 알고 요즘은 무조건 문자를 날리라고 미리 일러두는 판이다.

하지만 아예 휴대폰이 안되는 날이 있다는 것이 속편하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명당에 다니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휴대폰을 못 받지만, '못 받는 걸 어쩌란 말야?'하는 배짱이라 휴대폰에 목을 맬 일 없는 세상과 자유로운 날을 만끽한다.

그렇게 숲의 낙엽들과 바스락 수다를 같이 떠느라고 문자가 온 것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문자를 확인했다. 오후 늦게 온다고 했던 장춘섭씨가 보낸 문자였다.

"점심 준비해서 공릉으로 출발합니다."

문자가 온 시간을 보니 거의 도착했을 듯 싶었다. 허둥지둥 입구로 달려가다가 안되겠다 싶어 사무소에 있는 강근숙씨에게 전화를 했다. '근숙씨가 컵라면에 물을 부어 놓으면 어쩌지? 점심 준비해서 온다는데.'

공릉 근처에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도시락은 각자 준비한다. 라면이라면 질색하며 컵라면을 먹지 않는 해설사들에게 컵라면의 진수를 알게 한 것이 바로 나다. 김밥을 몇 번 사들고 다니다가 김밥도 지겹고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어 컵라면을 사들고 온 것이 시초가 됐다. 야외에서 먹는 뜨거운 컵라면 맛은 기가 막히다. 그래서 컵라면을 사들고 공릉으로 향하는 것이 요즘 해설사들의 습관이다.

근숙씨에게 전화를 걸자 아니나다를까, 전화벨이 울리고 "여보세요?" 한마디 하기가 무섭게 끊어져 버린다. 안되는 휴대폰이 갑자기 될 리가 있나. 헛일인 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건 것이다. 번번이 헛일인 줄 알면서도 급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전화를 걸고 주차장으로 달려가는 일이 반복된다.

장춘섭씨는 뒤늦게 늦둥이 딸을 낳아 오십이 넘은 나이에 남편 김성수씨와 애지중지 기르는 파주여성문학회 회원이다. 일가족이 점심을 준비해서 공릉 나들이를 나온 것이다.

파주시에 있는 문화재 일 때문에 나와 의논 할 게 있다며 집을 나서기 전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맘이 바뀌어서 아예 가족 나들이를 한 것이라 한다.

햇밤과 콩을 까 넣고 새로 지은 뜨거운 밥과 손수 만든 된장, 밭에서 뜯은 야채 쌈, 쑥떡, 과일, 동치미까지 바리바리 보따리 싸들고 온 춘섭씨 가족 덕분에 컵라면 대신 호화스런 점심을 먹었다.

a 조선 초기의 순릉 세호. 형상이 분명치 않고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조선 초기의 순릉 세호. 형상이 분명치 않고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 한성희

서울문화사학회 답사분과위원인 김성수씨는 문화유적에 미쳐서 15년을 답사 따라다니며 공부한 역사유적에 해박한 실력자다. 휴일이면 집을 나서는 남편을 이해 못해서 바가지를 긁었다는 춘섭씨도 지금은 물이 들어서 이젠 문화재라면 팔 걷고 나서는 문화재 가족이 됐다.

김성수씨와 공·순·영릉의 석물과 역사 배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휴대폰 이야기에 말이 미쳤다.

"여긴 휴대폰이 안 터져요. 바로 정문밖에 나가면 터지는데 이곳에 들어 오면 안 터지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명당이라 그런가요?"
"왕릉과 왕궁은 기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하죠. 기가 교차하는 곳은 무지 추워요."
"아참, 여기도 무척 춥대요. 불과 50m도 안 떨어진 연수원과 온도 차이가 무려 10도나 나서 온도계 고장 난 줄 알았데요."

관리 일을 하는 오씨 아저씨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공릉은 영하 15도고 연수원은 영하 5도라서 온도계가 고장난 줄 알았다고. 그 얘기를 듣고 겨울이 오면 온도계를 들고 한 번 직접 실험해 보려고 작정했었다.

"왕궁은 겨울에 가면 무지 추워요. 주위와 비교되지요. 기가 교차하는 대표적인 곳이 왕궁과 왕릉이에요."

조상들의 풍수 혜안은 현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지혜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친 김에 영릉 원훈에 올라가 앉아서 기를 받으며 돌아다니느라 피곤한 다리를 좀 풀어 보자고 했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느라 피곤에 절어 뻐근했던 다리가 여기서 30분 가량 앉아 있으니 술술 풀리던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남들이 믿거나말거나 가끔 여기에 앉아 나만의 비법으로 피곤을 풀곤 한다.

잔디밭은 평화로웠고 아래를 내려다 보며 왕릉의 풍수지리에 대해 또 대화를 나눴다. 세호에 대해 김성수씨에게 물었다.

a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가는 영릉의 하행 세호. 모습이 선명해진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가는 영릉의 하행 세호. 모습이 선명해진다. ⓒ 한성희

"조선 중기부터 모습이 분명한 상행과 하행의 세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거 아닌가요?"
"세호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서로의 이론을 가지고 굉장한 토론을 벌였지만 결론이 안 났지요. 상행과 하행은 우주의 기가 위로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오는 순환을 의미한다고도 하지요."

"그렇지만 둘 다 상행인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우주의 순환으로 해석이 안되지요. 왼쪽과 오른쪽이 상행 하행이 다른 것도 있고요."
"그래서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부분이지요."

"세호에 뚫린 구멍은요?"
"그건 광(무덤의 깊이)을 팔 때 비가 들이치지 말라고 위에 씌운 천이나 덮개의 줄을 매어 놨던 구멍일 거라고 해요."

하지만 조선중기로 들어서면서 세호의 모습이 분명해지는 대신 구멍이 없는 것도 많다. 덮개 줄을 매 놓았던 구멍이라고 하나 세호에 굳이 구멍을 뚫느니 기둥에 붙들어 매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광을 파고 재궁(관)을 내리고 흙을 덮은 다음 석물을 세우는 것인지, 석물을 먼저 조성하는 것인지도 의문이 간다. 석물을 후에 세운다면 구멍이 덮개 줄을 매는 데 쓴 것이라는 가설은 맞지 않는다.

a 공릉 산책로를 걸으면 저절로 여유가 생긴다.

공릉 산책로를 걸으면 저절로 여유가 생긴다. ⓒ 한성희

불과 수십년 전의 일도 정확하게 판명이 나지 않기 일쑤인데 수백년 전 왕릉에 쉽게 정답이 나올 리 없다. 그러나 하나만은 일치했다. 다음 날 춘섭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거기서 쉬어서 그런지 계속 무거웠던 어깨가 무척 가벼워요."
"그래요?"
"종종 가야 할까봐."
"올 때마다 점심 싸오세요."
"그럼, 그래야지."

춘섭씨뿐 아니라 근숙씨도 어깨가 가볍다고 하니 정말 명당의 기를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명당이라고 수다 떠는 내 말에 최면 걸려서 그런지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어깨가 가벼우니 좋은 현상이 아닌가. 휴대폰도 안 터지는 명당인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5. 5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