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탱자 알알이 박힌 그 가시나네 집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2>감기, 피로회복에 좋은 '탱자'

등록 2004.11.04 15:40수정 2004.11.0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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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익어가는 탱자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이종찬
내가 스무 살 시절까지 살았던 경남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길게 둘러쳐진 초가집이 대여섯 채 있었다. 도랑가 건너 산숫골에 두어 집 있었고, 새칫골로 가는 도랑가 주변에도 서너 집 있었다.


그 중 나는 우리 집과 10여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던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가시나네 집을 둘러싸고 있는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멋지고 길었다. 게다가 가을이 오면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유독 노란 탱자가 많이 매달렸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추수가 끝나면 낡은 초가지붕과 허물어져가는 싸리담장을 걷어내고 새로운 옷을 입혔다. 하지만 그 가시나네 집은 담장 하나만큼은 새롭게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 가시나네 집은 우리 마을 어르신들이 노란 새끼줄로 싸리나무 울타리를 열심히 엮고 있을 때 탱자나무 울타리에 삐쭉삐쭉 솟은 가지를 반듯하게 쳤다. 마치 이발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탱자는 감기, 피로화복,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탱자는 감기, 피로화복,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이종찬

보석처럼 알알이 매달린 노오란 탱자
보석처럼 알알이 매달린 노오란 탱자이종찬
"아부지! 해마다 와(왜) 사서 고생을 하십니꺼? 우리 집 담장에도 고마 탱자나무로 심어뿌모(심어버리면) 될 낀데."
"니는 이웃집 사람하고 가시담을 쌓아놓고 사는 기 그리 좋게 보이나. 그라고 집안에 훔쳐갈 끼 뭐가 있다꼬 가시가 삐쭉삐쭉한 탱자나무 울타리로 담까지 쌓을 끼고. 집이 머슨(무슨) 까막소도 아이고."
"그라모 탱자나무 가지치기로 할 때 낮게 치모 될 꺼 아입니꺼?"


그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탱자나무 울타리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한 동네에 사는 마을사람들끼리 숨길 게 뭐가 있느냐는 투였다. 파전 한 장을 부치더라도 야트막한 싸리담장 너머로 건네주면 될 것을 굳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아나갈 까닭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가 좋았다. 코흘리개 시절, 마을 공동우물가에서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나랑 신랑 각시가 되어 놀았던 그 가시나가 그 탱자나무 울타리 집에 살아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기에는 탱자껍질을 우려낸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감기에는 탱자껍질을 우려낸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이종찬

잘 익은 탱자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어린 날로 되돌아간다
잘 익은 탱자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어린 날로 되돌아간다이종찬
아무튼 나는 봄마다 동글동글한 탱자꽃을 하얗게 말아 올리고, 여름마다 나와 동무들에게 파란 탱자구슬을 선물하는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너무도 정겨웠다. 특히 가을이 되면 나와 동무들은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 곳곳에 보석처럼 노랗게 박힌 탱자를 한 알이라도 더 따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그럴 때마다 그 가시나는 마루에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가시에 찔려가며 탱자를 따고 있는 나를 뻘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루 아래 놓인 긴 장대라도 갖다 주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하지만 그 가시나는 내가 잘 익은 탱자를 하나라도 더 따기 위해 아무리 끙끙거려도 그림처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으~ 올개(올해) 탱자는 가시나 저거 맴(마음)처럼 와 이래 쓰노?"
"와? 저 가시나가 탱자 딴다꼬 뭐라 카더나?"
"그기 아이라 가시나 저기 시방 내로 딱 무시하고 있다 아이가."
"니 혹시 가시나 저거 좋아하는 거 아이가?"
"아… 아이다."
"근데 와 니 목소리가 떨리노?"


그해 늦가을,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 매달린 노란 탱자는 하얗고 굵은 씨가 유난히 많고 몹시 썼다. 노란 탱자 속을 쪼개 입에 넣으면 양 턱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하지만 그 쓴 맛 뒤에 코끝으로 스며드는 향긋한 탱자 향기와 달콤하게 스며드는 탱자맛은 그만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참 많았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참 많았다이종찬

가을, 하면 나는 그 가시나네 집에 매달린 노오란 탱자가 떠오른다
가을, 하면 나는 그 가시나네 집에 매달린 노오란 탱자가 떠오른다이종찬
그날, 나와 동무들은 그 가시나네 집 탱자를 양 주머니 볼록하게 채워넣고 마당뫼 고인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때 나는 툭 하면 토라지는 그 가시나의 마음처럼 쓰디 쓴 탱자를 인상을 잔뜩 찌푸려가며 맛나게 까먹었다. 손가락과 입술에 탱자진이 묻어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니 주디(입술)가 와 그렇노? 탱자 좀 따오라 캤더마는 고마 다 묵어뿟나?"
"안주(아직) 쪼매 덜 익었어예. 근데 탱자는 와 예?"
"요새 너거 아부지가 하도 속도 안 좋고 피곤하다캐싸서 약술로 쪼매 담을라꼬 그란다 아이가."
"탱자 그기 몸에 그리 좋습니꺼?"
"기침하고 가래 끓는 데도 좋고, 두드래기(두드러기)에도 그만 아이가."


해마다 늦가을이면 어머니께서는 빈 소주 대병에 잘 익은 탱자를 넣고 소주를 약간 부은 뒤 마개를 막아 촛농으로 붙였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아버지 밥그릇 옆에 마치 숭늉처럼 노란 탱자술을 한 대접씩 올렸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탱자술부터 한잔 쭉 드신 뒤 밥숟가락을 드셨다.

유자의 먼 사촌 탱자
유자의 먼 사촌 탱자이종찬

아나? 이기 뭐꼬? 탱자 아이가
아나? 이기 뭐꼬? 탱자 아이가이종찬
어머니께서는 간혹 우리 형제들이 트림을 끄윽~끅 하거나 배가 아프다고 할 때에도 아버지께서 드시는 그 탱자술을 조금 마시게 했다. 그러면 금세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끔뜨끔하다가 조금 지나면 정말 신기하게도 트림과 배앓이가 사라지곤 했다. 특히 감기에 걸렸을 때 어머니께서 탱자 껍질을 우려낸 뜨거운 물을 몇 번 마시고 나면 이내 감기가 뚝 떨어졌다.

"아나!"
"이기 뭐꼬? 탱자 아이가. 근데 탱자가 와 이리 크노?"
"문디 머스마야! 니 눈에는 그기 탱자로 비나?(보이나) 개눈에는 똥빼이(똥밖에) 안 빈다(보인다)카더마는."
"그라모 이기 뭐꼬?"
"감귤이다. 울 옴마가 제주도에 해치(들놀이) 갔다가 사 온 기다."


해마다 가을이 깊어갈 때면 그 가시나네 집 탱자나무에 보석처럼 콕콕 박힌 노란 탱자가 못 견디게 그립다. 툭 하면 삐죽이 토라져 탱자나무 가시처럼 내 마음을 콕콕 찔러놓던 그 가시나, 툭 하면 볼우물 살포시 피우며 향긋한 탱자향으로 다가오던 그 가시나에게 노랗게 잘 익은 탱자 몇 알 건네고 싶다.

내 어린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탱자
내 어린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탱자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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