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늙을수록 부부가 최고야!"

등록 2004.11.05 18:53수정 2005.08.0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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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광숙

지난 해까지만 해도 그 연세에 비해 십년 이상은 더 젊어보인다는 말을 들었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지병인 협심증이 악화돼 할 수 없이 심혈관 확장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 회복은커녕 아예 자리 보존을 할 만큼 상태가 악화된 것이다.


심장은 어찌저찌 응급 처치를 했는데, 이번엔 20년 된 당뇨가 말썽을 일으켰다. 약으로 근근히 유지됐던 혈당치가 500까지 치솟으며 온갖 합병증을 몰고 온 것이다.

열 효자보다 악처 하나가 낫다고 했던가. 영감 돌아가실까봐 혼비백산이 된 엄마는 정신이 없었다. 당뇨에 좋다는 약이 수북히 쌓이기 시작했다. 청국장환, 누에분말, 무슨무슨 약초뿌리, 온갖 비타민, 홍삼….

병원 약 사이사이 그 많은 명약을 복용하기에도 숨이 찬 하루였다. 위궤양에 신경통, 빈혈로 수시로 병원 출입을 하던 엄마가 달라졌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버지 간병에 힘든 줄 모르고 펄펄 날아다니다시피 했다. 영감 죽을까봐 정신이 번쩍 든 것인지, 당신의 병은 씻은 듯 사라진 것 같이 행동했다.

엄마의 지극한 남편 사랑을 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 남편이 우리 아버지처럼 평생 가족들을 괴롭히고 말썽을 피우다 병이 들었다면 나는 과연 우리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미운 짓만 골라하더니 끝끝내 마누라 못 살게 하는구나' 싶어 있는 구박, 없는 구박 해대며 물사발을 내동댕이 치지 않았을까.

칠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집안의 애물단지였다. 평생 딱 한 번, 내가 태어나기 전 미군부대에서 근무한 2년이 아버지 직장 경력의 전부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있는 재산 다 거덜내는 게 아버지의 주업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모으신 문전옥답 몰래 잡혀 사업한다고 전국을 떠돌던 아버지는 돈이 떨어지면 겨우 집에 들어왔다.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아버지를 찾는 전화는 항상 "조 사장님 좀 바꿔달라"는 내용이었다.

말썽꾸러기 맏아들 때문에 화병이 나신 할아버지는 그 울화를 술로 풀었다. 할아버지가 취하신 날은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마을 어귀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동네를 뒤집어 놓고는 집안에 들어오시면서부터 온식구를 달달 볶았다.


없어진 아들을 대신한 미움의 대상은 며느리였다. 온갖 트집을 다 잡아 엄마를 괴롭히는 할아버지를 보며 우리 사남매는 공포에 질려 뒤란으로 숨기 일쑤였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속담은 애당초 우리 집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아들 대신 며느리를 미워하는 할아버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의 고통의 원인 제공자는 누가 뭐래도 아버지였는데, 엄마는 시아버지인 할아버지만 증오했다. 그리곤 아버지 피해 도망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쪽문을 열어놓고 밤잠을 설쳤다.

'부처도 돌아 앉는다는 시앗'을 보고도 엄마의 남편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작은 남자 아기를 안고 들어 온 아버지의 여자. 그때 내 나이 열 다섯이었다. 훤칠한 키의 아름다운 젊은 여자. 어디로 보나 일에 찌들고 고통으로 망가진 엄마의 얼굴과는 대적이 불가능한 상대였다.

"엄마, 저런 사람을 어떻게 남편으로 믿고 살아? 차라리 이 집에서 나가서 엄마 인생 새롭게 찾아. 애들은 내가 책임질게."

딸 셋 아들 하나 중 첫째였던 나는 엄마에게 동생들은 내가 책임질테니 걱정 말고 나가라고 큰 소리를 쳤다. 한 여자의 인생이 너무 참혹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런 사람이라니…. 아버지한테 그래선 못 쓴다. 아버지 앞에선 절대 버릇없이 굴지 마라."

세상에. 나는 엄마의 질기디 질긴 남편 사랑에 앞발 뒷발 다 들었다. 처음으로 엄마가 미워졌다. 그렇게 사는 것도 다 엄마 팔자고, 엄마 책임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밉다기 보다는 혐오스러웠다.

'절대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는다.'

다짐하고 다짐했다. 여자든 남자든 자신의 자존심과 인격의 존엄성은 자신이 지키는 것이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 그것은 어린 나이에 내가 깨달은 진리였다.

할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뜨고 7년 뒤 할머니까지 돌아가셨다. 엄마는 오십 중반에 드디어 엄마만의 온전한 세상을 맞았다. 사남매 모두 출가시키고 난생 처음 맞은 신혼. 엄마의 신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물도 떠나고, 여자도 떠나고, 돌아온 탕아처럼 아버지는 다시 아내 품으로 돌아왔다. 그 뒤론 성질 급한 마나님이 시키는 대로 아버지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엄마가 시장에 갈 때는 배낭을 지고 얌전히 따라 다니는 포터요, 청소기, 세탁기, 쓰레기 비우는 것은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다. 금슬 좋은 비둘기처럼 사시는 두 분을 보며 우리 형제는 쾌재를 불렀다.

"엄마가 아버지 하고 이혼 안 하길 정말 잘 한 것 같다. 우리가 무슨 수로 저렇게 엄마를 모시겠니? 아무튼 늙을수록 부부가 최고야."

평생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 늘 기가 죽어 사셨다. 아주 작은 선물에도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긴 세월 동안 우리 가슴 속에 비워져 있던 아버지 자리. 우선 순위가 엄마인 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여분의 몫 중에서도 일부가 아버지 차지였지만, 아버지는 그것조차 감지덕지 하셨다.

당뇨 합병증으로 틀니도 맞지 않아 합죽이 할아버지가 되신 아버지. 치매 노인처럼 링거 맞느라 베고 누웠던 병원 검은 베개를 가방이라고 옆구리에 끼고 나오실 만큼 정신이 나가버린 우리 아버지. 침 질질 흘리며, 동전도 제대로 세지 못 할 만큼 손발에 마비가 찾아 온 아버지. 더 살고 싶다는 애절한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는 아버지. 그 긴 세월 아버지한테 품었던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오직 아버지가 우리 곁에 더 있어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밖에 없다.

저러다 돌아가시면 한이 남을 것 같아 왔다는 동생이 아버지 손에 두툼한 용돈을 쥐어 주었다. 남동생 내외는 비싼 홍삼 엑기스를 박스째 가져왔고, 둘째 여동생은 싱싱한 전복, 세발 낙지를 사들고 왔다.

비틀비틀 힘겹게 걷는 아버지를 보신 삼촌, 고모, 사촌 형제들도 모두 아버지께 봉투를 안겼다. 난생 처음 부자가 되신 아버지. 주머니마다 돈 봉투가 그득하지만 병든 아버지는 쓸 곳이 없다. 잡숫지를 못하니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이며, 제대로 걷질 못하니 고급스러운 양복이 무슨 소용일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에겐 풍요가 오히려 고통이지 않을까.

더 살고 싶다는 애착에 고통스러워 하는 아버지를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다. 세상에 난 순서대로 가지 않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니, 이제 내 나이엔 덜어내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떠나는 몸 무겁지 않게 뭐든지 덜어내고 뭐든지 나눠주리라. 예쁜 그릇도, 아끼는 애장품도 갖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훌훌 나눠주고, 남편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애착도 너희 알아서 살라고 마음 걷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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