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폄하된 홍주의병과 민종식 재평가해야"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학술대회서 홍성지역 독립운동 재조명

등록 2004.11.08 11:26수정 2004.11.0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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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저 일본이 병자년 통상 이후 갑신년 시월의 변과 갑오년 유월의 변이 있었고 을미년 팔월에 이르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다.

이어서 을사년 시월에는 우리 정부대신과 결탁하여 우리 군부대신을 협박하고 5조약을 늑성하여 우리 국권을 점탈하였으며 우리 생령을 노예로 하였다.


이에 통분하고 격동한 바 스스로 참을 수가 없어 왜국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저 오적을 섬멸하고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

군신상하가 함께 태평을 누릴 계획으로 병오년 봄에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였다."


민종식이 1907년 7월 3일 '평리원에서 창의대장(의병장)'을 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기 전 최후진술이다.

민종식은 홍주 의병 거병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안병찬, 박창로, 이세영 등의 추대에 의해 1906년 3월 11일(음 2월17일) 의병장에 오르고 사재를 털어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의 최선두에 섰다.

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그 자신 참판벼슬을 했던 민종식은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esse Oblige)'보다 더 고귀한, 유사 이래 면면히 이어온 호국정신과 의병정신을 철저히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1906년 5월 30일 홍주성에서 거병을 한 동지들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적에 비해 폄하된 채 역사에 기록돼 있다.

충남 홍성에 있는 홍주성 조양문
충남 홍성에 있는 홍주성 조양문안서순

이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과 홍성·청양지역 향토사학자들은 "항일투쟁에 나선 민종식이 자신의 영달이나 가문의 영광을 위해 숱한 고초를 겪은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의로운 길을 가기 위해 그 길을 택했는데 단지 패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1906년 3월 15일 정산에서 기병을 하고 2일 뒤인 1906년 3월 17일에는 청양군 합천에서 홍주성 공격을 위해 휴식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행군사마 안병찬과 참모관 박창노 등 26명이 체포된다.

지난 5일 충남 홍성군 홍성읍 혜전대학에서 '홍성지역 독립운동의 전개와 독립운동가' 학술발표를 한 충남대의 김상기 교수는 "당시 황성신문 영인본을 검색한 결과 1906년 3월 17일 홍주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청양 합천' 전투를 기록한 3월 22일자 신문에서 이날 체포된 안병찬 등 26명의 이름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들은 안병찬, 서덕현, 이종봉, 이은명, 민영옥, 이수화, 우재명, 박형진, 박온이, 최이기, 서선명, 최경삼, 임상춘, 이춘길, 오정삼, 학문숙, 윤택선, 서경춘, 방환덕, 강순업, 이두성, 한평심, 박용달, 박재환, 홍영섭, 정덕서 등이다.

복익채 홍성향토사학연구회 회장은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26명의 의병 이외에도 지역에서 그 당시에 홍주성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말이 몇 개 마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으나 현재 병오년(1906년) 5월30일 홍주성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금마면의 김씨와 박씨 집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이에 대해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며 "앞으로 잊혀진 의병들의 존재가 더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고 시사했다.

민종식은 이후 다시 1000여명의 의병을 규합, 보령 남포성을 함락시키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로 진군, 홍주성을 포위 공격해 20일 아침에 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10일만인 5월 30일 일본군 500여명과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성을 빼앗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3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의병 등은 수십명에서 1000여명이 전사했다는 등 여러가지 말이 있으나 당시 홍주 의병의 유병장이던 유준근이 체포 직후 쓴 마도 일기에서 '300여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300여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민종식은 참모들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부분을 두고 이후 민종식은 동시대의 의병장들에 비해 푸대접을 받게 되고 역사학자인 정인보로부터 '적이 오는 것을 듣고 달아나 죽음을 면한 자가 민종식이다.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치욕을 당하기까지 한다.

홍주의사총과 정인보가 쓴 비문
홍주의사총과 정인보가 쓴 비문안서순

현재 그 당시 순절한 의병들의 유골을 한 데 수습해 만든 '홍주의사총' 앞에는 정인보가 이 묘역을 조성할 당시인 1949년 민종식을 폄하해 쓴 '병오홍주의병순절' 비문이 서 있다.

홍성사학연구회는 이에 대해 "그 자리에서 대장이 부하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해서 대장을 깎아내리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며 "달아났다는 것은 도망갔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군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말로 대단히 위험한 표현이며 후일을 도모키 위해 그 자리를 피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고 정인보의 비문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들은 또 "홍주의병장인 민종식을 깎아 내리는 바람에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홍주 의병이 다른 지역의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를 덜 받고 있는 만큼 향후 이 부문은 역사를 바로잡는 의미에서도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 회장은 "이제 민종식을 재조명할 수 있는 충분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만큼 새롭게 비문을 만들어 세울 계획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홍주의병은 성패를 떠나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다"고 함축시키고 "유생과 민중 남서론과 남인의 당색 차이와 남당학파, 화서학파, 간재학파 등 학파를 초월하고 신분차이를 극복한 민족운동의 효시로 홍주성 전투 이후 이들은 청양, 남포, 당진, 부여 등지에서 1910년까지 의병활동을 계속했고 국망 후에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3·1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동북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평가되기에 충분하다"고 정리했다.

한글 비문
한글 비문안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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