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에 있는 홍주성 조양문안서순
이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과 홍성·청양지역 향토사학자들은 "항일투쟁에 나선 민종식이 자신의 영달이나 가문의 영광을 위해 숱한 고초를 겪은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의로운 길을 가기 위해 그 길을 택했는데 단지 패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1906년 3월 15일 정산에서 기병을 하고 2일 뒤인 1906년 3월 17일에는 청양군 합천에서 홍주성 공격을 위해 휴식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행군사마 안병찬과 참모관 박창노 등 26명이 체포된다.
지난 5일 충남 홍성군 홍성읍 혜전대학에서 '홍성지역 독립운동의 전개와 독립운동가' 학술발표를 한 충남대의 김상기 교수는 "당시 황성신문 영인본을 검색한 결과 1906년 3월 17일 홍주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청양 합천' 전투를 기록한 3월 22일자 신문에서 이날 체포된 안병찬 등 26명의 이름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들은 안병찬, 서덕현, 이종봉, 이은명, 민영옥, 이수화, 우재명, 박형진, 박온이, 최이기, 서선명, 최경삼, 임상춘, 이춘길, 오정삼, 학문숙, 윤택선, 서경춘, 방환덕, 강순업, 이두성, 한평심, 박용달, 박재환, 홍영섭, 정덕서 등이다.
복익채 홍성향토사학연구회 회장은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26명의 의병 이외에도 지역에서 그 당시에 홍주성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말이 몇 개 마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으나 현재 병오년(1906년) 5월30일 홍주성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지는 금마면의 김씨와 박씨 집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이에 대해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며 "앞으로 잊혀진 의병들의 존재가 더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고 시사했다.
민종식은 이후 다시 1000여명의 의병을 규합, 보령 남포성을 함락시키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로 진군, 홍주성을 포위 공격해 20일 아침에 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10일만인 5월 30일 일본군 500여명과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성을 빼앗기게 되고 이 과정에서 3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의병 등은 수십명에서 1000여명이 전사했다는 등 여러가지 말이 있으나 당시 홍주 의병의 유병장이던 유준근이 체포 직후 쓴 마도 일기에서 '300여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300여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민종식은 참모들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부분을 두고 이후 민종식은 동시대의 의병장들에 비해 푸대접을 받게 되고 역사학자인 정인보로부터 '적이 오는 것을 듣고 달아나 죽음을 면한 자가 민종식이다.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치욕을 당하기까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