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 마을을 찾아서

구름에 달 가듯이(31) 명작의 고향 - 이효석의 봉평 (1)

등록 2004.11.10 11:49수정 2004.11.1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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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효석문학관 전시)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효석문학관 전시)박도
그 옛날 장날 풍경은 찾아볼 수도 없다

횡성군과 평창군은 군계(郡界)가 서로 맞닿은 이웃이다. 이곳 안흥으로 내려온 후 이효석의 고향 평창 봉평을 메밀꽃이 한창 필 때에 간다고 미루어 오다가 그만 때를 놓쳐버렸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썰렁한 계절,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가 불쑥 봉평마을이 떠올라 장날이 언제인가 물었더니 2, 7일이라고 했다.


그날을 맞추기도, 기다리기도 쉽지 않고 지루해서 마음먹은 길에 이웃마을로 점심 먹으러 가는 기분으로 나섰다. 아직도 무면허인 처지라 아내 차를 빌려 탔다. 집을 떠난 지 30여 분만에 ‘한국문학의 가장 뛰어난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이라고 새긴 장승과 솟대가 늘어선 봉평장터 들머리에 닿았다.

효석문화마을 들머리의 정승과 솟대
효석문화마을 들머리의 정승과 솟대박도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 있으나, 석유 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예삿날인데다가 그동안 세월도 엄청 변해서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그 옛날 장날 풍경은 도시 찾아볼 수도 없다. 아마도 장날도 별반 다름이 없을 게다. 마침 효석문화마을 안내도에 가산공원과 충주집이 있어서 그곳부터 찾았다. 가산공원은 장터마을 들머리 봉평고등학교 앞에 있었고, 충주집도 거기서 엎어지면 무릎 닿을 거리에 있었다.

가산공원 안에 있는 이효석 상
가산공원 안에 있는 이효석 상박도
허생원이 동이의 따귀를 갈겨준 충주집터
허생원이 동이의 따귀를 갈겨준 충주집터박도
장판은 잔치 뒤 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함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 충주집은 자취도 없고 다만 그 자리에는 4층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약국, 제과점, 영어 수학 보습학원이 들어서고 뒤편 한 모서리에 ‘충주집 소머리국밥’이 들어섰다. 마침 점심 때라서 기왕이면 충주집에서 요기를 할 양 들어갔다.

하지만 옛 장터 객줏집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예사 국밥집이었다. 순대국밥으로 허기를 메우고 다시 답사 길로 나섰다.


봉평 재래 장터, 옛날의 장터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
봉평 재래 장터, 옛날의 장터 풍경은 찾아볼 수 없다박도
인간 본연의 에로티시즘

<메밀꽃 필 무렵> 표지석
<메밀꽃 필 무렵> 표지석박도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곧 여름 날 한밤중에 장돌뱅이 허생원이 멱을 감았을 흥정천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자 물방앗간이 나왔다.

요즘과 같이 흔한 러브호텔이나 민박집, 펜션, 모텔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보리밭이나 물방앗간, 심지어 상여집이 청춘남녀의 밀애장소였다.

나도향의 <물레방아>에서는 주인 신치규가 행랑살이를 하는 이방원의 아내를 유혹해서 정사를 벌이는 곳도 물레방앗간이었다.

허생원과 성 처녀가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이 맺어진 물방앗간
허생원과 성 처녀가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이 맺어진 물방앗간박도
그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국어나 문학시간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수 십 번은 더 가르쳤는데, 이 대목이 나오면 짓궂은 녀석들이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달라고 능청을 떨어서, 그 분위기를 설명해 주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졸던 녀석도 번쩍 잠을 깼다. 인간 본연의 에로티시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메밀밭은 늦가을이라 텅 빈 밭이 되었고, 길섶에는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새로 지은 ‘메밀꽃 마을’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다시 작품 속의 그날 밤으로 돌아가 보자.

작품 속의 한 장면을 메밀꽃 마을에 만들어놓은 모형
작품 속의 한 장면을 메밀꽃 마을에 만들어놓은 모형박도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이 대목은 서정 미학의 극치다.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등의 참신한 비유로 마치 그림의 한 폭을 보는 듯이 생생하고, 코끝을 스치는 메밀꽃의 아련한 향기와 토속의 언어는 공감각적인 이미지로 산문이라기보다 운문이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짐승(나귀)까지 모두가 하나로 된 심미 문학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

옛날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만든 메밀꽃 마을
옛날의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만든 메밀꽃 마을박도

이효석문학관 들머리에 서 있는 '가산 이효석문학비'
이효석문학관 들머리에 서 있는 '가산 이효석문학비'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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