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대 위 미역을 부여잡고 눈물을 참다

아내는 중풍 걸린 장모님 손길이 그리운가 봅니다

등록 2004.11.11 18:20수정 2004.11.1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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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고 우리 딸이 태어났습니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어서 처음으로 딸과 대면했습니다. 누구를 닮았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어머니는 내일부터 귤 딸 준비를 하겠다며 서귀포로 돌아갈 채비를 했습니다. 병원에 왔던 처형도 집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친정집 식구가 아무도 없으면 아내가 서러울까봐 진통을 시작할 때 제가 큰처형에게 전화를 해서 처형이 와 있었습다. 제가 옆에 있었지만 그래도 아내는 많이 서러웠나 봅니다.

문제의 미역국입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어제보다 더 쫄아서 많이 짰습니다.
문제의 미역국입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어제보다 더 쫄아서 많이 짰습니다.강충민
장모님께서는 첫째가 태어나면 산후조리를 꼭 해 주시겠다고 출산 전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나기 두달 전 갑자기 중풍이 와서 거동하는 게 많이 불편해지셨습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장인 어른이 도와 주지 않으면 행동하시는 게 많이 힘드십니다.

아내는 둘째를 낳았는데 장모님이 없는 게 못내 서럽고 장모님이 무척 보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첫째를 낳고는 저희 부모님이 계신 서귀포집에서 산후 조리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냥 산후조리원에 들어가겠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시어머니가 신경 써 준다고 해도 친정 엄마에 비하면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자기를 쏙 빼닮은 딸을 낳고 보니 거동이 불편한 장모님 생각이 더 났을 겁니다. 병실로 온 아내는 말이 없었습니다. 약간은 침울해 보이기도 했구요. 저는 짐짓 모른 척하며 태연하게 있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렇게 산후조리원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지난 주 목요일에 우리집으로 왔습니다. 어머니도 두차례 왔다 가시고 누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러 오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 없이 순조롭게 산후 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구요.

그런데 어제였습니다. 퇴근하고 아내에게 먹이기 위해 미역국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갔습니다. 그리고 쌀, 자른 미역과 쇠고기, 버섯, 깻잎 등을 샀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길게 줄이 늘어선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불현듯 장모님 생각이 났습니다. 처음 결혼 승낙 받으러 갔을 때 "우리 애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자네가 밥 짓고 반찬해야 한다"고 여장부처럼 또랑또랑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아내는 딸 셋인 집에 막내딸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저는 정말 횡재를 했던 거지요.

계산대 위에 미역을 올려 놓고 국거리용 한우 쇠고기를 다시 집어서 올려 놓는데 울컥하는 게 솟구쳐 오르더군요. 그냥 서러웠습니다. 첫째인 아들 녀석을 낳고 인사 갔을 때 당신이 산후조리를 해 줬어야 했다고 울면서 어눌하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장모님을 보며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던 아내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이제 마흔줄을 바라보는 늙은 놈이 계산대에 위에 물건을 올리다 말고 눈물을 참고 있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요.


집에 돌아와서 깻잎 묶음을 하나씩 하나씩 잘라 흐르는 물에 씻었습니다. 양파 다져 넣은 것을 간장과 고춧가루, 참깨 등등을 넣어 깻잎절임을 할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아내는 제가 만드는 반찬 중에서 깻잎절임을 가장 좋아하거든요.

어제 제가 만든 깻잎절임입니다. 오늘 아침에 밥을 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찍은 거라 좀 깔끔하지 못합니다.
어제 제가 만든 깻잎절임입니다. 오늘 아침에 밥을 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서 찍은 거라 좀 깔끔하지 못합니다.강충민
그 때였습니다. 양념을 차곡차곡 바른 깻잎을 밀폐 용기에 한장씩 담는데 다시 장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저희들이 결혼할 때 장모님은 아무것도 못 해 준다고 많이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첫째 낳기 전 처가에 들렀을때 당신이 꼭 몸 푸는 것은 도맡아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디서 받아온 듯한 밀폐용기를 꼭꼭 신문지에 싸 주시며 집에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그 밀폐용기에 깻잎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역을 물에 담가 불려서 물기를 꼭 짠 다음 참기름에 달달 볶고 국을 끓이는데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방에서 아이 젖을 물린 아내가 등을 돌리고 있는 저를 보고는 묻더군요. "왜?" 그냥 쓰윽 눈물을 훔치는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렸습니다. "응. 장모님 생각나서…." 기어코 그 말이 무던히도 참고 있던 아내를 울리고야 말았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더니 아무 기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서러움이 복받쳐 아주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아내를 울린 저는 달랠 생각도 하지 않고 베란다에서 애꿎은 담배만 피웠습니다. 팔팔 끓는 미역국을 가스레인지에 올려 놓은 채 말이죠. 그날 미역국은 평소보다 좀 짰습니다.

앞으로 삼주일 후에 아내가 몸을 추스리면 아내와 아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이쁜 딸을 안고 처갓집에 가렵니다. 그리고 장모님께 어리광도 부리고 일부러 오버도 하렵니다. 아내가 서러웠던 만큼, 그 마음만큼 제가 더 잘해야겠지요. 왜냐하면 저는 아내의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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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대학원에서 제주설문대설화를 공부했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 강사, 여행사 팀장, 제주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하고 싶은일, 재미있는 일을 다양하게 했으며 지금은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문화관광해설사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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