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머리말에서 말한다. '책을 읽다 보면 그 행간에서 자기 자신이 읽힐 때가 있는 걸 당신도 겪어봐 알 것이다.…'김경수
황 : "이렇게 만나네요."
김 : "20년 됐죠? 졸업하고 처음이니까. 그래요, 내가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광화문에서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죠. 너무 청순하게 걸어가는지라 말을 걸지 않았지만."
황 : "얘기하지 그랬어요."
그녀와 나는 문예창작과 동기동창생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학번으로 보면 그녀가 나보다 3년 선배다. 이창기의 <스무 살의 수사학> 서평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보면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올해는 다행히도 따뜻했지만, 대학 입학 학력고사, 요새는 수능이라 불리는 시험을 보는 날이면 유난히도 날씨가 춥다는 징크스가 있다. 내가 그 시험을 본 날도 지긋지긋하게 추웠었다. 그때 내가 제 학령보다 두세 살만 더 많은 나이였어도 시험 보러 가기를 오직 추위 때문에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다섯 살이나 더 많았기 때문에 시퍼렇게 언 얼굴로 꾸역꾸역 시험장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김 : 초등학생도 가지고 다닌다는 휴대폰이 없네요?
황 : "휴대폰 안 가지고 있는 것도 권력이다" 그랬더니 소설가 조선희씨가 "상이군인 같은 권력이다"라고 하던걸요.
우리가 못 느꼈던 '새로운 깨달음'
그녀는 일상에 치어 살면서 못 느꼈던 '새로운 깨달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복거일의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깨끗한 들깨> 서평 '시간의 압제에 맞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얼마 전에 택시를 타고 가면서 택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내가 예순 살이 좀더 돼 보이는 그와 서로 '아줌마', '아저씨'라고 칭하고 있는 데 대한 감상이었는데, 이제는 그쯤 나이가 드신 분과도 대등하게 말을 트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으니 착잡하기까지 했다.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 전혀 우스개가 아닌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분의 나이는 내 나이의 스무 배가 많았을 것이다. 내가 열 살일 때는 세 배, 스무 살일 때는 두 배, 지금은 한 배 반, 이런 식으로 그 분과 나의 나이 비율은 점차 낮아진다. 까마득히 어른으로 여겼던 선생님들, 친척들을 어느 날 문득 같이 늙어간다고 느끼게 되는 연유가 거기에도 있을 것이다.
김 : 시상이 떠오를 때 어떻게 해요?
황 : 그때그때 메모를 해야 생산력이 높은데 이제는 그게 안 돼요. 게을러졌어. 청탁이 오면 그때 비로소 써요. 집중력으로.
김 : 날씬하기가 여전하신데, 운동 뭐 하나요?
황 : 그렇지도 않아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 살이 자꾸 쪄요. 그래서 걷기운동 많이 하고, 헬스클럽 가서 러닝머신도.
케이트 쇼팬의 <이브가 깨어날 때> 서평 '결혼한 여자,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는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를 좀더 잘게 나누면, 세상에는 결혼이라는 틀이 체질에 맞지 않는데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기를 잘한 결혼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상대였으면 좋았을 결혼을 한 결혼한 사람, 그리고 결혼하면 좋았을 결혼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길 잘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러한 논리를 읽어가다 보면 참 참을성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바라볼 때 참을성이지 사실은 그만큼 차분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그녀의 '체질'이 아니겠는가.
김 : 결혼 안 할 거예요?
황 : 응. (잠시 쉬었다가) 프로포즈는 있었지만 거절했지요. 후후.
김 : 순수한 미소, 소녀 같은 말투 때문인지 성녀(聖女)처럼 보입니다.
황 : 성녀는 석녀(石女)와 읽는소리가 같아요. 후후후.
우스갯소리도 더러 하는 그녀는 이따금 편안한 친구 모임에 나간다. 문화를 아는 사람들이 어울려 술도 마시고 즐겁게 얘기도 하는 '번개' 같은 모임이다. 그리고, 책 읽는 데 시간을 보낸다.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은>은 모두 5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막의 꿈' '행복하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사랑도 없이 돈도 없이'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 '착한 사람의 행복을 위한'. 이 속에다 모두 서른여덟 가지 서평을 담아 놓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가 신경숙의 <자거라, 네 슬픔아> 서평 '물웅덩이 속으로 비치는 야릇한 하늘'의 첫 마디는 '제목 좋다!'다. 나도 한마디 하겠다. "시작 좋다!"
사진작가 구본창의 사진과 신경숙의 글이 만났다. 잘 만난 거 같다. 그들의 사진과 글은 서로의 슬픔을 깨우고 다독거리며 아름다운 이중주를 들려준다. 책을 곰곰 들여다보면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고집스레 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이중주가 화성을 이루는 건 신경숙 글과 구본창 사진이 비슷한 정조, 비슷한 어조여서일까?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조은의 시집 <따뜻한 흙>의 서평 '몸으로 다다를 수 있는 세계'에서는 조은의 마음 색깔까지 읽어놓았다.
<따뜻한 흙> 표지를 본다.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니 보면 볼수록 제목에 걸맞는 색깔이다. 녹색 테두리 안의 노르스름한, 따뜻한 흙 같은 색깔. 조은은 따뜻한 흙 같은 사람이다.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은> 속의 글들은 다른 서평과 읽는 맛이 확실히 다르다. 읽기 편안한 문체로 자신의 삶과 사색을 섞어서 좋은 책의 참맛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한 문장으로 그 책에 대한 촌평도 더불어 써 놓았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다정하면서 지적인, 또 잔잔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소설이다.
<멋진 한 세상>은 남자로부터 보호, 혹은 보조를 받지 못하는 여자 가장의 가난과 고독이 주조를 이루는 책이다.
<거세된 희망>은, 불결하고 불편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빈민촌의 주거 환경과 열악하기 짝이 없는 조건의 일자리를 그것도 어렵사리 얻는 빈민들, 정부와 공공 기관과 용역 회사가 결탁된 부조리한 취업 구조,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식들이 이런 삶을 벗어나게 해주지 못할 것 같은 그들의 절망스런 상황 등에 대한 폴리 토인비의 생생하고 '쿨'한 체험담이다.
<나를 부르는 숲>은 미국인과, 관광지가 아닌 자연으로서의 미국 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역사 앞에서>는 한 개인의 삶의 기록이 곧 역사인 진경을 보여준다.
<사랑의 학교>는 특히 학교 선생님들이 두루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중략) 모든 달들의 책이면서 특히 5월의 책이다.
김 : 그 서평들을 연재한 매체가 사보기 때문에 서평으로 다루지 않았을 책들도 있을 테지요. 최근 감명받은 책들 좀 소개한다면?
황 : 서준식의 <옥중서한>, 정수일의 <이슬람문명>, 박진숙의 <혜초일기>, 사진가 최민식 선생과 조은 시인이 만난 사진집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김 : 만화도 좋아한다고 아사다 지로 <장미도둑> 서평에 나와 있던데요. 어떤 종류를 특히 좋아하죠?
황 : 순정, 코믹, 추리….
일본만화의 거장 중 한 명인 가와구치 가이지가 작년에야 비로소 9년간의 연재를 마치고 일본에서 전32권으로 완간한 본격 군사만화 <침묵의 함대>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했다. 그 밖에 코믹조폭만화 <차카게 살자> <키드 갱>, 허영만의 <타짜>.
"앞으로 시인은 차츰 없어질 것이다"
그녀는 오규원 선생에게서 배운 시 학습을 잊지 못한다. 최상급 교수에게서 시를 배울 수 있었다는 추억과 은혜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김 : 그때 수업 시간에 내가 '전화번호부 속에서'라는 시를 썼는데, 이것은 시가 아니라며, 만일 시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변호해 보라고 하셨죠. 그랬더니 시 잘 쓰는 양선희씨가 일어나 변호했었요.
황 : 변호를 듣고 나서 "꿈보다 해몽이 좋네" 그러셨겠네. 후후후.
김 : 맞아요, 꼭 그러셨지요.
김 : 시인 지망생들에게 시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될 말 좀 해줘요.
황 : "음악을 많이 듣고, 많이 걸어라." 그런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깜짝 놀랄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