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받는 아버지를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등록 2004.11.21 22:07수정 2004.11.22 09:0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준수의 입원이 장기화되면서 주말이면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올라가는 일이 일상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는 아버지마저 구급차에 실려 원주 기독교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맹장 정도로만 여겼지만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한 결과 ‘게실염’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대장 벽에 염증이 생겨 농양이 커진 것이라고 합니다. 초기에 발견이 되었으면 수술 없이 약물 치료가 가능했는데 워낙 늦게 병원에 온 탓에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금요일 밤에 응급실로 오신 아버지는 토요일 오전까지 항생제를 투여하면서 수술 시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사의 얘기로는 농양의 범위가 워낙 커져서 대장의 일부를 잘라내야 할 거라고 했습니다.

준수의 다리에 약간씩 힘이 붙어 겨우 숨을 돌리며 사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날벼락을 맞은 꼴입니다. 하지만 피하거나 물러앉을 상황이 아닙니다. 항생제의 힘으로 간간히 웃으시며 난 괜찮으니 준수에게 어서 올라가 보라고 재촉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수술을 할 것처럼 서두르던 병원 측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소식이 없었습니다. 빠르면 오후에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늦으면 월요일이 되어서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애를 태웠습니다.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수술을 빨리 해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었지요.

무작정 기다리고 있자니 서울에 있는 준수가 걱정이 되고 그렇다고 훌쩍 떠나자니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안절부절 하는 내게 동생이 말을 건넸습니다. 토요일이라 수술을 할 거 같지 않으니 수술 시작되기 전에 얼른 서울에 다녀오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 모시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서울로 가라고 했습니다.

동생의 말에 힘을 얻어 집에 와서 준수와 아내가 필요한 속옷과 치료 도구를 챙겨 서울행 버스를 탔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습니다. 서울 갔다 오는 사이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서울행 버스가 출발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수술실로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달리는 버스를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후회하고 자책해봐야 소용이 없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니 준수가 아빠를 많이 기다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아빠가 못 올 것 같다고 하니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고 합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병실을 오가는 녀석이 제일 기다리는 게 주말에 올라오는 아빠라고 합니다.

일주일 만에 만난 녀석에게 우울한 모습 보여주기 싫어 웃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웃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허공을 맴돌았습니다. 그래도 준수 녀석은 일주일 만에 온 아빠 앞에서 휠체어를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는지 자랑하며 아빠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저녁 늦게 아버지의 수술이 잘 끝났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수술 후 상태를 지켜보아 2차 수술 여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화장실 가고 싶다는 준수의 휠체어를 뒤에서 밀어주며 수술 후 회복실로 가셨다는 아버지께 사죄했습니다. 수술실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를 자책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콩나물밥 이렇게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