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티셔츠가 겨우 15유로?

샤넬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 속물근성을 비판하다

등록 2004.11.24 00:02수정 2004.11.24 11:42
0
원고료로 응원
'구찌'의 수석디자이너이던 톰 포드는 "패션의 변화란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선 장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가난뱅이의 삶이 부유하게 바뀌지 않는 한 '크리스찬 디올'의 비싼 가방은 가난뱅이의 일반적인 패션이 아닌 장식에 불과하다.

H&M을 위한 라거펠드 컬렉션 홍보 사진. 오른쪽이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
H&M을 위한 라거펠드 컬렉션 홍보 사진. 오른쪽이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H&M’
작금의 시대에 패션이란 돈 많은 사람들의 옷 바꿔 입는 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전 세계적으로 명품이라 불리는 제품들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으며, 하다못해 '비싸야 잘 팔린다'는 부풀린 명제 때문에 시시한 제품마저 비싼 가격으로 날개돋친듯 팔려나가고 있다.

한국만 해도 웬만한 수입품은 모두 명품으로 둔갑했으며, 명품족이라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다. 명품을 사려고 푼돈을 모으거나 명품을 면세점에서 싸게 사려고 해외여행을 자주 나가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오늘날의 패션은 패션의 가치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있느냐로 평가받는다.

여기에 반기를 든 디자이너가 있다. 그가 평범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고급 명품의 수석디자이너기 때문에 그 반응은 더욱 뜨겁다.

판매 첫날 오전 9시 빈의 H&M 매장 앞. 이른 아침부터 컬렉션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판매 첫날 오전 9시 빈의 H&M 매장 앞. 이른 아침부터 컬렉션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배을선
독일 출신의 칼 라거펠드(65)는 현재 설명이 필요없는 프랑스의 고가품 '샤넬'과 이태리 상표 '펜디', 자신의 개인 상표 '라거펠드 갤러리'의 수석디자이너다. 그가 스웨덴의 중저가 브랜드 'H&M'과 손잡고 매우 저렴한 컬렉션을 한정해서 선보였다.

칼 라거펠드는 "온 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속물근성의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토로한 뒤 "돈 많은 부자들이 패션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H&M과 특별 컬렉션을 열게 된 이유에 대해 "H&M은 진취적이고 패션 감각이 있어서 내가 평소에 아주 좋아하는 상표"라고 H&M을 칭찬한 뒤 "진정한 패션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가장 멋지게 소화해 입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컬렉션의 하이라이트인 티셔츠. 디자이너 라거펠드의 얼굴이 그려 있다.
컬렉션의 하이라이트인 티셔츠. 디자이너 라거펠드의 얼굴이 그려 있다.배을선
칼 라거펠드가 디자인한 샤넬의 티셔츠를 사려면 몇 백 달러를 투자해야 하지만, 칼 라거펠드의 얼굴이 그려진 H&M 티셔츠는 15유로도 되지 않는다. 물론 이 티셔츠는 판매 시작 첫 날인 19일 개점 10분 만에 모두 품절되었다. 현재 이 티셔츠는 인터넷 이베이(E-Bay)에서 49유로에 판매하고 있다. 원래 3배가 넘는 비싼 가격이다.

현재 유럽 전역 H&M 매장에서 웬만한 제품들은 판매 개시 첫날 모두 품절된 상태다. 오스트리아 H&M 대표이사인 클라우디아 오즈발드는 "잘츠부르크와 가까운 이웃나라 슬로베니아에 남아있는 약간의 재고품을 빈으로 회송해 판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세계 1000여 지점에서 판매된 칼 라거펠드의 H&M 컬렉션은 패션 역사상 첫 저렴한 명품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어쨌든 명품'이라며 그의 컬렉션을 무조건 사 모으는 소비층과 이베이에서 비싼 가격에 재판매하려는 사람들처럼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이 현상에 대해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는 "속물근성을 비판한 내 컬렉션을 속물들이 사 가다니!"하며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여성복과 남성복, 선글라스, 벨트, 반지가 판매되었으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
여성복과 남성복, 선글라스, 벨트, 반지가 판매되었으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했다.배을선

H&M(Hennes & Mauritz)은 어떤 상표?
의류부터 악세서리, 화장품까지 판매

▲ 홍보용 H&M 그래픽
ⓒH&M
1947년 스웨덴에서 헤네스(Hennes)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품질이 좋은 옷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는 설립 취지 아래 유럽에서는 특히 젊은 소비층인 10대와 20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일종의 멀티브랜드로 여성복과 남성복, 캐쥬얼과 정장, 유아복과 아동복, 임산복, 화장품과 액세서리를 총괄한다.

소비층을 사로잡는 것은 디자인과 가격. 품질은 스페인 상표인 자라(ZARA)와 망고(MNG)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제품은 대부분 중국과 동남아시아, 터키와 동유럽에서 주문자부착상표(OEM)로 제작되고 있다.

매출액과 매장 숫자에서는 몇 년 사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류기업인 베네통(Benetton)과 에스트리(Esprit)를 따라잡았다. 작년 평균 매출액 5900만 유로를 기록했으며 매년 성장률 상회 곡선을 그리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 총 1000여개 지점과 4만여 직원을 거느린 H&M은 연간 매출 세계2위를 차지하면서 세계1위 미국 의류상표 갭(GAP)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이번 H&M을 위한 라거펠드 컬렉션은 상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비밀리에 계획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미지 고급화와 어마어마한 매출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 배을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3. 3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4. 4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5.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