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서 열린 귀농인들의 큰 잔치

귀농운동본부에서 연 2004 송년회

등록 2004.11.30 06:54수정 2004.11.3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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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묻히며 사는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속리산 기슭 '충북자연학습원'에서 전국귀농운동본부 주최로 2004년 귀농인의 날 행사가 열렸는데 200명이 넘게 왔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는데 식당아주머니 얘기가 170명분을 준비하라고 해서 했는데도 밥이 모자란다면서 밥 먹은 사람이 200명은 훨씬 넘겠다고 했다.


임낙경 목사의 '농사와 건강' 강의 모습.
임낙경 목사의 '농사와 건강' 강의 모습.전희식
날씨는 따스했고 사람들은 편했다. 진행은 짜임새가 있었고 흙살림연구소 이태근 선생과 시골교회 임낙경 목사의 강연도 훌륭했다. 지역별 장기자랑도 흥겨웠고 뒤풀이 잔치는 새벽 다섯 시까지 이어졌다. 흙을 묻히며 사는 사람들은 놀기도 잘 놀았고 재주도 많았다. 덩실덩실 춤도 잘 추었고 민요도 잘 불렀다. 누구나 장구채를 잡았고 북을 쳤다.

부모 따라 온 초등학생 하나는 즉석에서 이날 잔치를 소재로 한 가사바꿈 노래를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귀농을 선택한 사람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너른 들판보다 산골짜기 버려진 땅에 뿌리내리는 사람들. 다 떠나버린 농촌으로 돌아와 무너진 집을 일으켜 세우고 허물어진 논둑을 다시 쌓는 사람들. 흙을 살리고, 공기를 살리고, 물을 살리는 생명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지은 농사로 떡을 한 시루 해 온 사람. 자기 동네 막걸리가 맛있다고 몇 통 가져 온 사람. 자연 소재로 곱게 물들인 옷을 지어 온 사람들. 모두가 믿음직스러웠다.

수수농사를 400평 했다는 무주의 안병서씨는 수수농사로 재미를 봤다며 가져 온 수수를 펼쳐놓고 농사법을 친절히 소개했다. 상주에서 온 이명학씨는 삼백초를 길러 차를 만들었다고 효능을 자세히 적어 넣은 쪽지랑 같이 나눠주었다.

'오지방'에서는 전기나 전화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속닥거렸고 '대안교육방'에서는 가정학교(홈스쿨)를 하거나 대안학교에 자식을 보내는 사람들이 모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 들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 들었다.전희식
'처녀총각방'에는 이른바 유통 기간이 지난 사람들도 북적거렸다. '건강방'에서는 약은 한 봉지도 없고 자연식과 각종 행법(몸 다루기)들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차방'에서는 술보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있었다.

이들이 나누는 얘기들은 생산적이었다. 여느 술자리에 안주감으로 곧잘 등장하는 정치인 험담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비분강개하여 나라꼴 개탄하는 자칭 지사(志士)들도 없었고 이 자식 저 자식 하면서 자기 집 종놈 부르듯이 나라님들을 들먹이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럴 겨를이 없는 사람들이다. 좋은 얘기 나누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고, 서로를 북돋우고 남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우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이튿날 아침 일찍 겨울 숲 산책을 했는데 작년처럼 숲 전문가 정용수 선생이 안내를 했다. 농민들 행사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정 선생은 농부야말로 숲의 자식들이라고 했다. 옛날 농부들은 숲에서 농기구를 다 조달했고 숲에서 집지을 재목을 구했다고 했다. 거름이나 땔감도 숲에서 나왔고 농부들이 마시는 물도 공기도 숲에서 제공되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숲과 들이 만나는 지점에 마을을 만들고 산에 기대어 사는 우리 농부야말로 숲의 자식 같았다.

'쌀되박 재기' 놀이
'쌀되박 재기' 놀이전희식
제일 재미있었던 놀이가 있었다.
'쌀되박 재기' 놀이였다. 부인네들이 나와서 쌀을 손대중으로 1.5키로 담아 저울에 달아 제일 근사치가 되는 사람이 우승하는 놀이였다. 열두 명의 내로라하는 손저울 전문가들이 도전을 했는데 1750그램, 2235그램, 1512그램 할 때마다 같은 지역 사람들이 환성과 탄식을 질렀다. 전자저울 수치가 정확히 1500그램이 나온 사람이 있었다. 양평에서 생협 일을 하는 남연정씨였다.

제기차기도 재미있었고 팽이치기도 재미있었지만 제일 재미없는 놀이가 있었으니 팔씨름 대회였다. 내가 져 버린 놀이였다. 작년 최 우승자로 소개되면서 우쭐대며 단상에 올랐지만 준결승전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서른 중반쯤 돼 보이는 귀농학교 28기라는 새파란 젊은이에게 무릎을 꿇었다.

내년 귀농인 잔칫날 꼭 설욕을 하리라는 다짐보다도 이제 팔씨름 판에서 물러나야 할 때인가 싶어 후줄근한 내 나이가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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