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매달린 까치집이 마치 정겨운 이웃처럼 보인다이종찬
왜냐하면 집 주변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두 개나 짓게 되면 그 집안이 금세 망해 셋방살이 신세를 하게 되거나, 남편이 바람을 피워 두 집 살림을 하게 될 징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동무들도 마을 주변의 나뭇가지에 까치집이 나란히 두 개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면 재수 나쁘다며 돌팔매질을 하곤 했다.
"까치들도 점점 사람을 닮아가는구먼."
"저거는 까치 가족이 셋방살이를 할라꼬 집을 짓는 기 아이라, 까치 숫컷이 바람을 피운 기라카이. 그라이 까치 암컷이 집을 못 짓구로(짓게) 저리 깍깍거리며 난리로 피워쌓지."
"쉬이~ 듬정떼기 들을라. 그렇찮아도 객지에 돈 벌러 나간 신랑이 소식이 없어가꼬 속이 터져 죽을라 안 카더나."
그랬다. 1970년대 초반 우리 마을 아버지들은 추수가 모두 끝난 농한기가 다가오면 가까운 건축현장에 나가 날품을 팔거나 겨울이 끝날 때까지 객지에 나가 돈벌이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크게 다쳐 병원비가 더 많이 들 때도 있었고, 간혹 소식조차 아예 끊기는 때도 더러 있었다.
마을에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을 어머니들은 긴 장대를 들고 나가 뒤에 지은 까치집을 마구 쑤시곤 했다. 까치들도 대단했다. 까치들도 마을 어머니들에게 결코 지려 하지 않았다. 마을 어머니들이 틈만 나면 긴 장대로 까치집을 그렇게 들쑤셔놓아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까치집이 반쯤 지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까치와의 끊질긴 싸움에서 마을 어머니들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듬정댁은 이른 새벽마다 두 개의 까치집이 매달린 그 나무 앞에 찬물을 떠놓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남편이 새 식구를 데리고 돌아와도 좋으니 제발 집으로만 돌아오게 해 달라며.
"아빠! 저 까치집도 사진 한 장 찍어"
"왜?"
"저 까치집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그랬다. 막내딸 빛나의 말처럼 나의 고향도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 고향을 떠난 게 아니라 창원공단조성으로 인해 그리운 내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꺼번에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새로운 까치집을 하나 짓긴 했지만 마치 뒤에 지은 까치집처럼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때 내 고향집과 내 고향마을과 내 고향들판을 사진으로라도 남겨놓겠다는 그런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하긴 그땐 사진기도 몹시 귀했다. 아니, 지금처럼 자그마한 자동 카메라나 디지털 카메라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살았던 창원군 상남면 소재지에 '희망사진관'인가 하는, 이름도 가물거리는 그 사진관이 꼭 하나뿐이었으니까.
사진을 찍었던 기억 또한 별로 없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한 번 찍었고, 중학교 입학원서에 붙히기 위해 또 한 번 찍었던가? 하지만 그 사진조차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두 개의 까치집을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던 마을 어머니들도,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두 손을 싹싹 빌던 듬정댁도 보이지 않는다.
노오란 초가지붕이 이마를 정겹게 맞대고 있었던 내 고향마을이 있었던 그 자리에는 지금 반듯반듯한 이층 양옥집이 뒤늦게 지은 그 까치집처럼 뺀질거리고 있다. 보리가 마악 싹을 틔우던 들판이 있던 그 자리에는 반듯한 백화점과 20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그때 두 개의 까치집이 매달린 그 미루나무처럼 우쭐거리고 있다.
"아빠! 까치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살아?"
"제 집이 있잖아"
"지붕도 없잖아. 곧 눈이 펑펑 쏟아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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