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책으로 쓰면…"

연극 속의 노년(12) : <손숙의 '어머니'>

등록 2004.12.15 14:07수정 2004.12.1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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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은 역시 "나만큼 고생한 사람도 없을 거야" "정말 내 인생 책으로 쓰면 소설 열 권도 넘을 걸. 암, 장편대하소설로도 모자라고 말고"가 압도적이다.

어르신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보통 '멋진 시어머니가 되는 십계명' '건강 장수 십계명' '치매 예방 십계명' '마음을 여는 대화법 열 가지' 등 숫자가 들어간 제목으로 말씀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씩 짚어가면서 정리해 드리면 좀 쉽게 알아들으시는 데다가 공책에 받아 적는 분께도 편리하기 때문이다.


'노년 십계명'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라!"는 항목이 있다. 나만큼 고생한 사람, 나만큼 외로운 사람, 나만큼 노력한 사람… 같은 표현을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동정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뜻이 여기에 들어 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르신들께 말씀드리기를, 자녀나 젊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살아온 인생을 제발 좀 알아달라는 호소는 피하시라고 귀띔을 해 드리곤 한다. 개개인은 장편대하소설일지 몰라도 전체로 보면 작은 점 하나 정도로 여길 것이므로 스스로를 굳이 불쌍하게 만드실 필요는 없다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싫어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연극 <손 숙의 '어머니'>는 이런 나의 생각을 아주 확실하게 바꿔놓았다.

연극 속 어머니는 올해 예순 아홉. 드라마 작가인 아들과 교사인 며느리, 중학생 손녀, 어린 손자와 한 집에 사신다. 살림꾼이긴 하지만 잔소리가 심하고 잘 웃고 잘 우는 분이다. 어느 날 꿈인 듯 생시인 듯 세상 떠난 남편이 나타나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하자 고개를 저으며 소리치신다. "나는 안 가요! 못 가요!"

세상살이의 애착보다는 그동안 쌓인 한과 원을 다 풀고 가겠다는 말씀이시다. 곱게 늙어 아무런 맺힌 것이 없어 보이는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 가슴 속 한은 평생 끌어안고 살아온 '신주단지'에 차고 넘쳐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계집애라고 글도 못 배우게 한 아버지, 그 아버지는 논 서 마지기를 받고 딸을 낯선 남자에게 내어준다. 사랑을 맹세한 동네 총각 '산복'을 떠나 팔려가듯 시집가는 '일순', 그런 일순을 손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산복은 감나무 위에 올라가 신랑 등 뒤에 대고 하릴없이 감을 던져 댄다.

남편은 아내의 이름마저 바꿔버리고, 거기다가 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남편의 바람기, 네 살이 되도록 걷지 못하는 큰아들, 이어서 6·25 전쟁. 시어머니 홀로 놔두고 떠난 피난길에서 남편은 식구들을 팽개쳐두고 사라지고, 몸은 성치 못해도 마음만은 착하기 그지없는 큰아들마저 그만 전쟁통에 잃고 만다.


그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살아온 어머니, 세상 떠날 날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아들 며느리 앞에서 그 아들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꺼내고는 무당굿으로 죽은 넋을 위로해 준다. 눈물로도 통곡으로도 다할 수 없는 어머니 가슴 속 한이 아들의 넋을 불러내고, 그 아들은 이제 어머니의 눈물로 씻겨져 저 세상을 향한다.

손자, 손녀에게 글을 배워 남편이 억지로 지어준 가짜 이름 아닌 진짜 이름 '황일순'을 쓸 수 있게 된 어머니. 첫사랑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도, 피난 올 때 홀로 남겨두고 온 다리 못쓰는 시어머니 소식도 아직 듣지 못했지만 더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머니는 죽은 남편을 따라 나선다.

어머니가 몸으로 겪은 시절은 어느 것 하나 쉽지가 않았다. 일제 시대, 해방, 6·25 전쟁, 분단으로 인한 가족의 헤어짐, 거기다가 여자이기에 겪었던 서러움과 어려움까지 더하면 어머니의 삶은 그 자체가 역사이며 드라마이며 장편대하소설이다.

어머니의 표현 그대로 아무리 '무지렁이'라고 해도 가슴 속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똑같은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이 엮어내는 커다란 그림이며 길고 긴 기록인 것이다. 전체로 볼 때 하나의 작은 점이면 어떻고, 지워진 글씨면 어떠랴. 이미 완결된 작품인 것을.

이제는 어르신들께 말씀드리리라. 인생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써온 어머님 아버님의 삶에 아낌없는 박수를 치시라고. 다른 사람이 무어라 하든 실제 겪은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보듬어 안으시라고.

자칫 무거워지기 쉬운 연극을 과거 회상 장면의 아기자기한 구성과 재미로 웃음을 주면서 이끌어가서, 객석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면서도 사이사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연극 속 어머니가 살아오신 세월을 내 어머니도, 다른 어머니들도 다 같이 걸어오셨다. 그러니 어찌 어머니 한 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랴. 무대의 불이 꺼졌을 때 이 연극은 이 시대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생각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머니 이야기에 연로하신 어머니들의 관람료 할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바로 그 어머니들이 같이 보신다면 좀 좋을까. 배려는 결코 커다란 것이 아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작은 구석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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