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길거리에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영혼을 추모하는 제1회 나자로 추모제도시빈민선교회
하지만 설교의 주류는 종말론적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희망과 성공보다, (죽어서)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영광에 목표를 두었지요. 그래서 헌금은 물론 귀금속이나 시계 등을 아낌없이 바치는 일은 저 천국에 누릴 상을 위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전혀 달라졌잖습니까? 오늘 이생에서 복 받고 성공하는 믿음체계로 전환되었지요. 물론 영혼구원은 예수 믿는다는 '입으로의 시인'에 거의 머물고, 대부분의 중심축이 축복과 건강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자도 문제지만 후자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성장주의, 규모의 논리, 성공주의인 이 맘몬(돈)이 가증스럽게도 거룩한 곳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여기에서는 이기주의의 온상이 될 뿐 이타주의나 자기 헌신과 희생의 논리는 자리 잡기 어려운 구조가 있습니다. 특히 고난과 자기 비움의 문제는 아예 신앙의 구조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교리주의, 교조주의, 근본주의, 일방주의입니다. 아시다시피 신앙은 주관적 경험이요, 체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하나 되는 신비의 일체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하지요. 이 경험에서 자신의 생명과 같은 '고백'이 나오고, 이 고백은 경험자가 모두 같지 아니한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결국 이 고백들이 교회라는 공동체 사회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합의되어 공동의 고백으로 발전되지요. 많은 시간과 절차가 소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식적인 고백들은 더 발전되어 교조(교회의 신조)와 교리체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리와 교조는 신비적 경험의 신앙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교리와 교조가 신앙의 근본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주의, 교조주의는 본말이 전도된 논리입니다. 이른바 신앙의 검증은 '하나님 경험'이라는 영적 관계를 동시적으로 포함한 교리체계로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결과물인 교리나 교조로 무장된 교회의 신앙체계는 예수께서 지적한 대로 외식이요, 율법이요, 죽은 것이고, 이것은 근본주의를 낳고 일방주의를 낳지요. 그래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고, 타자에 대해 판단과 정죄에 밝고, 공격적이고 정복적이에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의 잘못됨을 바꾸려하며, 더 배우려는 자세가 없고 가르치려고만 하며,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며, 상호 눈높이를 맞추려 않고 우월적 권위에 사로잡혀 있어요. 한국교회에는 생명이 충만한 유기체적 신앙,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되는 영적 경험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메마른 고목처럼 화석처럼 교리주의와 근본주의만 가득한 형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