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민단체 간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청소년인권센터'의 문을 여는데 30분 가량 인권에 대한 강의를 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부담 갖지 말고 청소년 인권에 대해 교사로서 평소 생각을 말해달라는 말에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허락하고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초임교사 시절이었다. 지금은 주번제도가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주번교사가 주번학생들을 모아놓고 일장훈시하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곤 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주번종이 울렸다. 주번들이 마치 군대에서 선착순하듯이 달려와 줄을 섰다.
가장 늦게 도착한 두 학생에게 주번교사는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으라는 이른바 '원산폭격'을 명했다. 두 학생은 지체없이 머리를 땅에 박았고, 기합은 주번조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잠시 뒤, 아직도 아픔이 가시지 않은지 찡그린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교실을 향해 걸어가는 한 아이를 내가 불러 세웠다.
"너, 왜 기합을 받은 거냐?"
"예? 아, 제가 잘못했어요."
"무슨 잘못을 했는데?"
"오늘 주번 조회에 제일 늦게 나왔어요."
"선착순으로 한 줄로 세우면 언제나 맨 꼴찌는 있게 마련인데?"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를 웃음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허공에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넌 머리를 땅에 박고 기합을 받아야 할 만큼 큰 잘못을 한 게 아니야."
이 말을 학생에게 직접 하지 않고 허공에 날려보낸 것은 같은 편끼리 이적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직장윤리랄까, 동료교사에 대한 알량한 의리 때문이었으리라. 하긴 그 아이를 불러 세웠을 때 나는 이미 그 선을 넘고 만 셈이지만.
청소년인권센터 개소식은 30명이 채 안 되는 청소년들과 다섯 명 안팎의 어른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먼저 내빈 소개가 있었다. 나도 내빈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낯설기도 했지만 어른으로서 대우를 받는 기쁨보다는 어딘지 섭섭한 마음이 더 앞섰다.
다시 건너갈 수 없는 푸른 강물 속으로 풍덩 빠지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다행히도 그런 당치 않은 바람은, 오늘만은 교사로서 알량한 의리를 저버리고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리라는 숙연한 다짐으로 변해 있었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등교시간이 조금 늦춰지긴 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 8시부터 교문에서 지각단속을 했지요. 명칭은 분명히 아침자율학습인데 그 시간에 늦으면 지각생 취급을 하고 운동장을 돌리기도 하구요. 지금 대다수 고등학교에서는 희망자 조사도 하지 않고 전교생이 강제로 보충수업을 하고 있지요.
문제는 학교에서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다보니 이제 여러분도 거기에 길들여져 그것이 부당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다 보면 여러분도 나중에 누군가의 인권을 쉽게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인권침해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가끔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이 너무 떠든다 싶으면 교사로서 나의 인권을 침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그 말 앞에 꼭 붙이는 말이 있다.
"선생님이 평소 여러분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고맙게도 그 한 마디에 자세를 고치는 아이들도 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아이들의 진지한 눈빛! 혹시 그것은 내가 먼저 날려보낸 인권의 부메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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