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유학생 사망' 5년 한 올핸 풀릴까

[해외리포트] 타국서 아들 주검 지키는 아버지의 하소연

등록 2004.12.30 17:30수정 2005.01.0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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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런던 근교의 모처에서는 몇 명의 영국 유학생, 교민이 모인 작은 저녁모임이 열렸다. 근사한 진수성찬이 차려진 자리도 아니며 그런 걸 바라지도 않는다. 모두들 한 아버지의 새해 소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낯선 땅에서 5년째 아들의 주검을 지키고 있는 이영호씨. 병원 냉동실에 잠들어 있는 아들 고 이경운(사망당시 17세, 영국 켄트대학 1학년 재학, 한국 국적, 스페인 출생)군. 이군은 2000년 9월 영국 켄트 대학 입학후 보름도 채 안돼 불의의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경찰의 조사 결과는 교통사고에 의한 현장즉사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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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맘대로 매장할테니 그리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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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전 런던 시내 관광중인 이경운군 ⓒ 이경운참진회

이군의 가족들은 이군의 사망원인이 교통사고였는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이군의 어머니와 동생은 아직 시신도 보지 못했고, 이군에 대한 정식 사망진단서도 발급되지 않은 상태다. 병원 측은 이군의 부검을 실시했다고 했지만 부검증빙자료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01년 1월 16일 사망심의회 개최 후 경찰 측은 일방적으로 사건 종료를 선언했고, 병원에서는 3월 2일까지 시신 인도를 하지 않을 경우 강제 매장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까지도 시신확인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대사관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유가족에게 시신 인도를 종용했다.

사인 심의회(Inquest)란?

검시제도를 운영하는 영국에서는 사인 규명을 위해 사망 심의회를 열게 된다. 사인 심의회는 죽음의 종합적인 원인을 밝히는 자리로 누가, 어떻게,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를 판결한다.

즉 누군가 심장마비로 숨졌다면, 심장마비는 ‘어떻게’에 해당하며, 여기까지는 의학적 판단이다. 이밖에 왜 그런 일이 발생했고, 언제, 어디서 그랬는가를 전반적으로 밝히는 것. 증인이나 각종 물증도 동반되지만 사법 기능을 갖지 않으며 이후 사법 조치가 필요할 경우 이를 참고로 해당 기관에서 진행한다.
유가족들은 홀로 남았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심신을 이끌고 5년 째 아들 이경운군의 사인 규명을 위해 싸우던 고인의 부친 이영호씨. 이씨는 지난 11월 7일, 피를 토하고 쓰러져 병원에 응급 후송됐다. 출혈이 심해 수혈을 받아야 했다. 진통제 다량 복용과 신경성 위궤양으로 위벽내 혈관이 파열되면서 생긴 심각한 위출혈이었다.

담당 의사는 왜 그렇게 진통제를 먹어야 했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도 진통제 없이 버티기 힘들었던 이씨의 사정을 의사가 알 리 없다.

다행히 이씨는 근 2주 동안의 입원 치료 후 건강을 되찾았고 병원 입원 전 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됐다.

현재 유가족들은 유가족입회, 사진촬영이 이루어지는 지극히 '정상적인' 2차 부검을 준비중이다. 1차 부검 결과 자료는 실제 시신의 상처부위와 다르게 기재돼 있고 엑스레이 필름도 없는 엉터리였다. 부검이 이뤄졌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사망 후 3년이 지나 입수한 6장의 시신 사진은 조작 또는 합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아들의 죽음을 증명할 자료로 제시되어온 것들 - 제대로 된 공식 사망진단서 발급 거부, 사망 날짜가 제각각 다르게 기재된 서류들 - 은 유가족으로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제 새해가 되면, 이씨는 영국에서 다섯 번째 해를 맞게 된다. 이씨의 새해 소망은 아들 경운군이 편히 쉴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번이 영국에서 맞는 마지막 해가 되길 바랄 뿐이다.

다음은 이영호씨와 나눈 대화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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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영호씨 ⓒ 박성진

- 몸은 괜찮나? 쓰러졌을 때 입원 당시 병원 응급치료 차트에 의식 불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는데….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응급실 의료진들은 계속 눈을 떠보라며 꼬집고 충격을 줬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차가운 병원 냉동실에 갇혀있는 경운이 생각이 밀려오면서 내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는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세상을 보기가 싫었다. 나중에 응급치료 차트를 보니 초기에는 ‘의식 불명’으로, 얼마 후 기록에는 ‘환자가 눈을 뜨려 하는 의지가 없다’고 돼 있었다."

- 이군이 사망한 지 만 4년이 넘게 흘렀다. 2차 부검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사건해결에 거는 기대가 전보다 훨씬 크다. 아무래도 2차 부검이 현 시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 부검의 선정 및 관련 절차 부분을 구체적으로 준비중이다.

2차 부검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론 1차 부검 자체가 적법하게 실시되었는지 확인하는 일도 해야 한다. 1차 부검을 ‘정말 했는지’ 의심이 간다. 지난 번 MBC-TV 다큐멘터리 <논픽션 공감> ‘피살자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찾아서’ 편에서도 나오지 않았는가."

"주영한국 대사관 유가족 부검 협조, 믿어도 되나?"

이영호씨와 인터뷰가 이뤄진 며칠 뒤, 12월 30일 대사관으로부터 이메일 회신을 받은 이씨는 대사관이 공언한 부검 협조가 정말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강력히 의혹을 제기했다.

이씨에 따르면, 대사관측에서 부검 협조건 관련하여 이씨에게 보낸 이메일 문서에는 "막상 국내 부검의가 주선되어 영국에 입국한다 하여도, 예상치 못한 견해 차이로 인해 제2차 부검이 실시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감안, 유가족측은 영국 측의 관련 규정을 존중하여, 유가족 측의 부검 직접 입회, 부검 장면을 촬영할 사진 기자의 동행 등 지난 2001년 4월 10일 2차 부검 예정시의 요구 조건들을 제기하지 않고 부검의의 결정에 따른다"는 내용을 유가족에게 단서 조항으로 달고 이에 답신할 것을 요구했다.

이씨는 1차 부검을 의뢰하고 사인심의회를 진행하였던 검시관측에서 주영대사관에 보낸 팩스 서류에 의하면 '(이경운 시신은 유가족 소관이므로) 검시관측은 이경운 유가족이 2차 부검을 실시하는데 대해 전혀 개입하지 않겠으며 부검 의사를 임의로 선정하여 뜻대로 실시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이씨는 "대사관측이 유가족에게 제시한 상기 요구 조건이 영국 경찰인지, 병원인지, 검시관인지 아니면 주영대사관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박성진
- 대사관에서 2차 부검에 협력하겠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국과수에 의뢰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라고 들었다.
"퇴원 후 12월 8일 런던 시내에서 주영 대사관 김종용 총영사와 고문희 영사를 만났다.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유가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사관에서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박스기사 참조)

- 사건 발생 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영한국대사관 측과 갈등이 심했던 걸로 알고 있다.
"사건 초기에 유가족에게 협박에 가까운 행패를 부린 사례도 있었고 ‘관련 영국 당국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대사관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으니 시신을 매장하든지 그 다음날 당장 비행기를 예약해 시신을 옮겨가라’고까지 말했다.

내가 정신 이상자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국회 통일안보외교위원회에서는 내가 보호관찰 대상에 해당한다는 식의 보고 자료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해 안 가는 것 중에는 대사관측에 이 사건 관련 기밀문서가 있다는 것이다. 사건의 주인은 유가족이다. 도대체 유가족에게 보여주지 못할 사건 관련 서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상식적으론 이해되지 않는다."

- 이군의 시신이 옮겨졌는데, 시신에는 문제가 없는지.
"10월 14일 켄트 앤 켄터베리 병원에서 윌리엄 하비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병원은 경운이 사건과 관련해 시신 강제매장 압력을 넣어온 스티브 오닐이 분쟁 조정관으로 근무하던 병원이다. 당시 유가족, 변호사, 대사관 어디에도 사전 통보 없이 시신을 임의로 옮겼는데, 어떠한 절차로 어느 장의사가 시신 이송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MBC 취재팀과 함께 병원에 직접 찾아가 시신을 보려했지만, 사전 예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다만 영안실 담당자는 경운이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방문 전 통보만 주면 언제든지 ‘보관중인 상태 그대로’(즉 냉동된 현 상태로) 시신을 볼 수 있으며, 유가족은 물론 동행자까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신이 옮겨진 날이 정말 10월 14일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시신은 현재 안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주영 한국대사 인사가 있다는데, (현 이태식 대사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조윤제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신임대사로 부임할 예정)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대사관이 유가족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거라 믿는다. 조윤제 신임대사 내정자도 부임 후 이 사건에 각별히 신경 써주었으면 한다. 단순히 한 개인의 불운한 죽음을 넘어선 문제다. 그 동안 주영 대사가 직접 나서주었다면 벌써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고도 남았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 아무래도 새해 가장 큰 소망이라면 이 사건이 해결되고 진실이 밝혀지는 걸 텐데.
"경운이가 떠난 지 만 4년이 지났고 5년째 접어들었다. 모든 게 말끔히 밝혀지고 경운이도 편히 잠들게 됐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이 사건을 놓고 참기 힘든 거짓 소문도 참 많았고 일부 사람들과 갈등도 있었다. 그런 것에 더 이상 신경 쓰기도 싫다. 조용히 묵묵히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

이 자리를 빌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유학생, 교민 여러분, 서울 광화문 등지에서 촛불 시위를 벌인 네티즌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을유년 새해에 모두들 복 많이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영국 한인 유학생 이경운군 사망사건 관련 의문점들

▲ 이군은 언제 사망했는가? - 위(염방부확인서)문서, 아래(사망사실통보서신)문서의 사망일은 30일, 29일로 다르게 기재돼 있다. 위 문서는 잉크 색깔마저 다르다.
* 영국 경찰측 사건보고 내용 요약

2000년 9월 29일 오후 3시 34분 경 영국 캔터베리시 세인트 조지(St. George) 거리를 걷던 중 차도로 진입한 이경운(켄트 대학 1년 재학중)군은 시속 15~20마일 정도로 서행하던 통학버스에 역과되며(run over : 몸을 완전히 치고 지나감) 현장에서 즉사했다.

* 부검과 시신관련 의문점들

1. 장의사에서 다시 병원 영안실로 돌아온 시신 : 2000년 10월 6일 유가족의 동의 없이 병원 영안실에서 장의사로 시신이 옮겨졌다. 이후 유가족이 시신 확인을 계속 강력히 요구하자 시신은 다시 장의사 영안실에서 병원 영안실로 유가족 통보나 동의 없이 옮겨졌다.

2. 1차 부검, 정말 했나? : 1차 부검이 실제 실시됐는지에 대해 의혹이 있다. 유가족이 받은 부검 서류에는 서면으로만 간략히 되어 있고, 부검사진 등 증빙 자료가 전혀 없다. 골절상을 입었다고 기록됐으나 병원 측은 엑스레이 사진도 갖고 있지 않다. 시신 사진에는 왼 손과 왼쪽 허벅지가 붕대(혹은 유사물질)로 가려져 있다. 이는 이영호씨가 10개월 후 첫 시신 확인할 때도 볼 수 있었다. 이영호씨는 2000년 10월 2일 병원 도착 후 검시보좌관 데이비드 케어로부터 '아직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고 기억한다. (아래 사인심의회 부분 참고)

한편, 최근 고 이경운군 사건을 다룬 MBC-TV 다큐멘터리 <논픽션 공감 피살자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찾아서>(2004년 11월 12일 방영) 편에 출연한 법의학자 한길로 박사는 고인의 사진을 관찰한 후 부검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소견을 냈다. 아울러, 시신에 나타난 흔적이 흔히 교통사고 역과 흔적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기도 쉽지 않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3. 이전 2차 부검은 왜 실패했나 : 병원측은 2001년 3월 2일까지 고인의 시신을 인도하지 않을 경우 강제 매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유가족을 협박했다.

유가족은 매장 압력에 시달리며 부검 비용을 선지급하고 2001년 4월 10일로 2차 부검일자를 잡았다. 시신확인이 안된 상황이라 우선 부검실에서 시신을 확인한 후 부검 참관을 하겠다고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심지어 정복 경찰이 병원에 나와 유가족을 감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신 확인과 부검 참관을 요청하는 유가족과 이를 반대하는 병원측과 검시 보조관의 견해가 좁혀지지 않아 부검은 무산됐다.

4. 사인 심의회 : 사망 3주후로 예정됐던 사인 심의회가 구체적인 이유나 사전 통보 없이 2001년 1월 16일로 연기돼 실시된다.

사인 심의회 결과를 기록하는 필수 자료인 속기록의 존재 여부가 불투명하다. (이날 심의회는 4시간 여에 걸쳐 진행됐다. 현재 유가족은 대사관 측에 검시관이 서명한 사인 심의회 기록서류를 확보해 줄 것을 정식 요청한 상태다.)

심의회 당시 최초로 증언대에 오른 부검의 압두카디르는 유가족 도착 이전인 10월 2일 오전 11시부터 1시간 30분에 걸쳐 부검을 마쳤다고 증언했다. 이에 이영호씨는 유가족 도착 당시 검시 보좌관이 '부검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기억을 되살려 부검의 증언에 이의를 제기했다. 곧 심의회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심의회를 주관하던 검시관은 즉시 정회를 선포했다. 약 5분 후 심의회가 재개됐다.

재개 후 유가족에 요청에 따라 부검의가 제시한 검시 차트(엉성하게 손으로 직접 그려 만든)에는 유가족이 도착 후 확인한 시신 얼굴에 분명히 있었던 상처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유가족이 당시 촬영한 얼굴 사진을 제시하며 사실 여부를 추궁하자 부검의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심의회 진행을 위해 검시관은 상세 질문을 심의회 마지막 순서로 미루고 부검의에게 심의회장에서 대기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부검의는 자취를 감췄다.

5. 사망 10개월 후 공개된 시신 : 사망 후 이군의 얼굴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 시신 전신 확인은 이후 10개월 후에 이루어졌다. 고인의 부친 이영호씨를 제외한 모친과 동생은 아직도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6. 경찰 측이 전달한 시신 사진 : 유가족은 2003년 11월 경 유가족 변호사측으로부터 이경운군 시신 사진 6장을 전달 받게 된다. 이 6장의 사진은 지난 2000년 10월 12일 사건담당 경찰이 장의사 영안실에서 촬영한 것으로 돼 있다. 무엇보다 6장의 사진을 법의 사진 감정사에게 감정 의뢰한 결과 모두 합성 조작됐다는 공증된 감정서를 현재 보유하고 있다.

7. 시신 이송 : 2004년 10월 14일 고인의 시신은 켄트 앤 켄터베리 병원에서 윌리엄 하비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유가족, 변호사, 대사관측에 사전 통보가 없었다. 시신 이송 이유는 대사관 공지를 통해 냉동결함으로 발표됐다. 유가족은 다른 시신도 동시에 옮겼어야 하는데 과연 모든 시신을 옮겼는가 의문을 제기했다. 윌리엄 하비 병원은 본 사건 관련 시신 매장 압력을 넣어 온 바 있는 분쟁조정관(Risk & Legal Manager) 스티브 오닐이 근무하던 병원이다. 유가족 측은 이경운 시신 이송 날짜가 14일이 아닌 다른 날짜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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