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무지개를 쫓는 소년처럼 살고 싶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63) 을유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등록 2004.12.31 14:10수정 2004.12.3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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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기다리면서

a 필자 부부

필자 부부 ⓒ 박도

새해 설날을 앞두고 오늘은 딸이, 내일은 아들이 내려온다고 한다. 우리 집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제사를 물려받은 1980년대 초부터 신정을 쇠고 있다.

그때만 해도 설날은 구정이라 하여 하루밖에 쉴 수 없는데다가, 명절 때마다 민족대이동으로 온 나라가 교통난을 겪었다. 거기다가 설날은 대체로 2월 달이라 늘 학년말 사무로 바쁠 때였다. 그런데 신정은 겨울방학 중이라 아무래도 여유가 있었고, 아내도 제수 물가가 비싸지 않아서 여러 모로 좋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내가 공직에 있을 때까지는 신정을 쇠기로 하였다. 아우들도 신정에는 교통난도 덜 하고, 구정 때는 처가나 시가에 갈 수 있다고 오히려 신정 쇠는 걸 좋아했다.

나는 올해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20여 년 쇠어오던 신정 차례를 다시 되돌리려고 하니까, 조상님도 헷갈릴 것 같아서 아우들과 더 진지하게 상의해 본 다음 결정하기로 하고, 그동안 지내온 대로 올해도 신정을 쇨 참이다.

며칠째 추위로 아래채 글방에서 철수하고 본채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아이들이 내려오면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아서 딸이 서울서 출발한다는 전화를 받고 아래채 온돌방에다 곧장 군불을 지폈다.

불쏘시개로 갈무리해 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자 곧 '딱딱' 소리를 내면서 고래로 잘 빨려갔다. 아궁이에 앉아서 장작을 밀어 넣고는 이런저런 생각에 젖었다. 때가 때인지라 다가올 새해에 할 일들이 생각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동안 숱하게 맞이하는 새해이건만 내년은 을유년으로 ‘해방둥이’인 나는 갑년을 맞는 해이다. 우리 동양문화권에서는 60년은 인생의 큰 한 주기로 기념하는 해다.

옛날에는 60을 넘기는 이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평균수명이 70 전후라 60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60은 다시 60갑자가 시작하는 해로 아무튼 하나의 획을 긋는 해임이 틀림없다.

첫 작품집을 내던 1989년 제자들이 마련해 준 출판기념회에서 나는 엉겁결에 죽기 전까지 10권의 책을 내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내뱉은 뒤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앞뒤 생각 없이 말한 내가 몹시 미웠다. 그때 내뱉은 말 탓인지 10권은 이미 채웠다.

하지만 소설을 쓴다면서 전작 장편 소설은 한 권밖에 내지 못하고 나머지는 산문집이거나 사진첩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장편 소설로 달콤하고도 슬픈 러브스토리를 쓰고 싶다. 그리고 내가 늘 별러왔던 고향출신 독립군 영웅 이야기도 소설로 집필하거나 최소한 자료 수집은 마칠까 한다.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흔히들 ‘인생은 60부터’라고 하는데, 죽는 날까지 나이를 의식치 않고 늘 무지개를 쫓는 소년처럼 꿈꾸면서 살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탄 시외버스가 막 새말나들목(IC)을 지났다고 전화가 왔다. 딸은 전공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다니기에 여태 공부를 하고 있다. 아들은 지난해 졸업하여 곧장 취업하여 회사에 다닌다.

올 봄부터 서로 떨어져 사는데다가 그 녀석은 회사일로 늘 바쁘기에 얼굴 보기가 더욱 힘들다. 네 식구가 한 자리에서 밥 먹기가 무척 드물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옛 어른의 말이 꼭 맞다. 이것이 인생인가 보다.

제 어미와 안흥면사무소 앞 정류장에 나가 딸을 맞아 뒷좌석에 태워 집에다 데려다 놓자 집안에 훈기가 돌았다. 나는 아래채로 건너와 이 글을 두드리고 있다. 내일 저녁에 아들이 오면 더 행복할 것 같다.

다른 집에도 신정 연휴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오순도순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a 아내와 딸, 아들. 아무리 사진첩을 뒤져도 최근 10년 동안은 네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아내와 딸, 아들. 아무리 사진첩을 뒤져도 최근 10년 동안은 네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다. ⓒ 박도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
………………
- 김종길 <설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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