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라는 권력은 사회 속의 경험을 고정하고 먼저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간의 권리라는 보편성에서 미성년이라는 범주는 아직 성숙 ‘과정’에 있는 인간, 그런 점에서 완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결여된 인간군을 의미한다. 이 불완전과 결여는 근대사회가 강조해 온 권리의 보편성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 근거로 설정된다. 즉 미성년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미 불완전한 존재이고, 무엇인가 부족한 인간 취급을 받는다. 불완전과 결여라고 표상되는 이 차별의 구조는 성인만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하는 이상한 전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미성년자와 관련해서 중요한 지점은 그 차별의 근거가 아주 특별한 ‘보호’라는 맥락과 닿아 있는, 다시 말해 휴머니즘 담론과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아동과 미성년자는 보호의 대상이고, 특히 어떤 점에서는 이 보호의 수준이 문명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측면마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어린이 보호라는 개념의 출현이 근대로와 관련해서 파악할 수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대상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문명사회’의 절대적인 임무로 규정된다. 문제는 이 보호되어야 하는 주체, 보호를 필요로 하는 주체는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온전하게 가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발달과정에 있다는 신체적 성숙과 관련된 이야기,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정신적 성숙에 관한 이야기, 자립할 수 없는 존재를 환기시키는 경제적 성숙에 관한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전개된다. 하지만 성숙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더욱이 나이가 성숙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성숙을 재는 척도는 다양할 수 있고, 당연히 다양한 척도들은 다양한 기준을 가질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다양한 척도들이 일관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 기준들 사이에 균열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체적 성숙, 정신적 독립, 경제적 자립 사이에는 일관된 기준 설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현실적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문제는 미성숙을 인정하더라도 왜 권리를 유보해야 하는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청소년은 충분히 다양하지만 그 차이가 주목되지 않는다. 십대를 정의하는 이미지는 아주 단순하게 하나의 사례를 청소년 집단의 문제로 환원한다. 예를 들어 무책임은 나이와 무관한 개인의 문제이지만, 한 개인의 사례가 미성년자라는 범주의 문제로 인용된다. 십대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계속 생산된다. 문제가 될 만한 사례가 발견되면 아주 단순한 회로를 통해서 바로 그 세대의 문제로 인용되는 것이다. 폭력과 범죄, 원조교제, 가출, 약물 중독 등의 병리적 현상 중 어떤 것도 미성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런 사례가 발견되기만 하면 사회와 언론은 미성년 세대 전체에 대한 상징적 폭력으로 계속 공격한다.
사실 이러한 범주화는 다른 감수성에 대한 상징적 폭력도 적지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 청소년들은 일반적으로 기성세대와는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가지는 감수성은 사회적 의미 작용에서 책임감이 없다든지, 아니면 같이 일하기 힘들다든지 하는 맥락으로 자꾸 인용된다. 다른 감수성과 다른 욕망의 존재에 대해 섬세하게 들여다보기보다는 재단되고 규정되면서 문제로 치환되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으로 청소년들의 머리 모양이나 염색, 패션, 선호하는 음악 장르에 대해서 아주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일종의 기성세대가 가지는 감수성에 대한 편견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른중심주의가 매우 강하다. 어른중심주의는 교육의 패러다임이든, 복지라는 패러다임이든 그 안에 내재해 있다. 십대를 대상화하면서 구체적인 존재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런 틀 안에서 십대들의 자기표현과 욕망이 가지는 생산성이 주목될 수 없다. 그리고 서로 다른 세대들, 서로 다른 개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서로 승인하지 못하는 한 나이라는 권력의 논리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세대 간 갈등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해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이 사회적으로 팽배하다. ‘관계 맺기의 공포’를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자율성의 기획’을 추진해야 한다. 단순히 문제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자율적 능력을 신장시키는 협업적 관계가 필수적이다.
한 편이 한 편을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자율적 기획을 추진해야 한다. 자율성의 기획은 문제를 어느 한 편으로 환원하거나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자기 기준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논리를 변형시키는 작업은 차별의 극복 과정에서 만남을 상상하는 것, 서로 자기의 위치를 떠나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새로운 관계의 ‘윤리’를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호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