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깍이 대학색인 김아무개씨는 한 기관의 신입사원 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지만, 나이 제한 때문에 응시기회가 2005년 한해뿐이다.인권위 노정환
김씨는 1976년생이다. 2005년에 30세가 됐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 군 입대, 대학 입학, 휴학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늦깎이는 취업 준비생에게는 결코 자랑이 아니다. 많은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데 나이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가 올해 응시할 기관 역시 30세 나이 제한이 있다. 그래서 김씨에겐 올해 한 번밖에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인권위 진정, 나이 차별 중 74%가 고용 관련
한국사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는 많은 영역에서 기준과 잣대가 된다. 높임말과 반말을 쓰는 기준, 술 한잔 따르는 순서 등은 차라리 웃고 넘길 일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종종 차별의 도구로 쓰인다. 이는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나이를 이유로 한 각종 진정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2004년 12월 20일 현재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사건은 모두 85건이다. 차별 진정 사건의 9%에 해당한다. 85건의 사건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고용은 74%를 차지하는 63건이다. 이 가운데는 모집 과정 관련 진정이 39건을 차지했다. 이밖에 재화의 공급과 이용 제한이 6건, 교육시설 이용 제한은 4건이 접수됐다.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나이 관련 진정 중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구제가 이뤄져 해결된 사건의 일부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 농어민들에게 무담보 대출 보증을 서 주는 한 신용보증기금은 70세 이상에게 보증 대상에서 제외했다. 70세 이상은 경제적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 A씨는 전남의 한 시청에서 2004년 초에 약 석달간 전산직으로 1차 공공근로를 했다. 그런데 3월에 2차 공공근로를 신청하자 시청에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A씨를 탈락시켰다.
▲ 한 카드 회사는 65세 이상의 신규 발급 신청자에게는 카드를 발급하지 않고 있다. 신용카드는 신용을 위주로 카드를 발급하는 것인데, 신용보다 나이를 우선으로 한 것이다.
▲ 여성 네티즌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한 인터넷 쇼핑몰은 회원 가입을 받는데 만 17세 이하와 만 50세 이상은 가입 대상에서 제외했다.
10개 공기업, 나이 제한 폐지
이상과 같은 진정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나이는 각 영역에서 제한이 필요할 때 가장 손쉽게 쓰이는 수단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2002년에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기간제 교사의 재임용을 막는 근거로 나이를 내세우기도 했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한 B씨는 본인이 담당한 과목의 시험 문제와 모의고사 답안지가 사전에 유출되는 사건을 겪었다. 이에 B씨는 학교에 유출 사건과 관련한 해명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B씨와 해당 학교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학교는 이듬해인 2003년 기간제 교사 재임용에 만 35세 이하라는 제한 규정을 신설했다. 인천 시내 90개 고등학교 중 유일한 규정이었다.
국가인권위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교육부는 기간제 교사는 교사 자격증만 소지하면 가능하므로 나이 제한은 차별로 판단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결국 이 사건은 B씨를 1년간 재임용하는 조건을 학교측이 받아들이면서 합의종결(2003. 9. 15.)되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고용과 관련하여 어떻게 차별의 수단으로 쓰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채용시 나이를 기준으로 한 차별은 고용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전북의 한 군은 지난 11월까지 보육시설 관련 규칙에 "(보육시설) 종사자의 채용 응시 연령은 20세 이상으로 하되, 시설장은 40대 이상으로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이 규정은 보육시설 원장에 응시하려던 C씨(30)가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한 후, 조사 과정에서 합의 종결되면서 연령제한 규정을 삭제하는 것으로 개정됐다(2004. 11. 22.).
2003년 12월 차별연구회는 "22개 공기업이 2003년 직원 채용시 나이 및 학력을 제한한 것은 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다. 이에 국가인권위는 조사를 벌였는데, 이 22개 공기업 중 금융감독원, 근로복지공단, 예금보험공사, 방송위원회 등 10개 기업이 나이 제한을 철폐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2004. 10. 14.).
나이는 최근 명예퇴직의 중요한 기준으로도 종종 악용되고 있다. 2002년 신용보증기금은 구조조정을 하면서 직급별 나이 기준을 정해 명예퇴직을 시행했다. 그러나 당시 부지점장이었던 이아무개씨는 나이를 기준으로 한 퇴직은 부당하다고 판단해 그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이씨의 사직을 유도하기 위해 한직으로 전보 발령하고 급여를 삭감했다. 이 사건은 신용보증기금에서 국가인권위의 합의안을 받아들여 이씨를 원상회복하는 조건으로 합의종결됐다(2003.12.29.).
명예퇴직 중요한 기준, 나이
교육계에서도 나이를 이유로 한 차별이 없지 않았다. 14개 국립대는 2002년에 교원을 모집하는 데 있어 일정 나이를 초과한 이는 응시할 수 없도록 나이를 제한했다. 이유는 ▲ 연구 능력 향상 및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젊은 교원 필요 ▲ 교수진의 연령분포를 적절하게 유지하여 학사 운영과 업무의 연속성을 기한다 등이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국가인권위의 권고에 의해 삭제됐다(2002. 11. 18.). 교육자의 연구 능력이나 자질은 연구 실적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데, 연령과 연구 실적과는 상호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게 권고 이유였다.
이밖에도 최근까지 교육공무원을 해외에 파견할 때는 교장 58세, 교감 56세, 교수 46세 이하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해외 한국학교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젊은 교사 선호 등이 이유였다. 그러나 교육부에서 제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해외 한국학교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파견 교사의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있으며, 위계 질서나 인건비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해 나이에 의한 차별이라고 판단, 해당 규정 개정을 권고했다(2004. 8. 2.). 이에 교육부는 나이를 제한한 관련 조항을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