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잃을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영화 속의 노년(88) :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록 2005.01.03 15:06수정 2005.01.0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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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중년의 나이를 일러 누구는 이제 언덕길을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꽃은 이미 떨어졌고 잎이 지는 일만 남았다고도 한다.

언제 한 번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내 세상인 양 "야호!"하고 소리쳐 본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 한 번 활짝 꽃 피웠던 것 같지도 않은데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한다고, 이미 꽃은 떨어졌다고 하니 참 어이없기도 하다. 이런 게 인생인가 싶으면 중년의 나이가 문득 억울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오래 전에 공책 한 구석에 적어놓은 글귀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놓아 알아보기도 힘든 글의 제목은 '나이 드는 것이 좋은 이유'. 그 내용은 모두 다섯 가지이다.

'나의 분수를 알게 되었다,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인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a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포스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포스터. ⓒ 대원씨앤에이

열여덟 살 소녀에서 하루아침에 90세 할머니가 되어버린,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의 '소피'는 나이를 먹으니 더 이상 놀랄 일이 없다고 한다. 또한 더는 잃을 것이 없다고 한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늙음에 대한 통찰이 이 만화영화 곳곳에 숨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겨주신 모자 상점에서 쉴 틈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열여덟 살 소녀 '소피'는 우연히 마법사 '하울'을 만나게 되고, '황야의 마녀'가 내린 저주에 걸려 그만 90세 할머니로 변하고 만다.

그대로 머물면 가족에게 짐이 될까 싶어 집을 떠난 소피는 하울의 집인 '움직이는 성'으로 들어가 청소부가 되어 그곳에 머물게 된다. 하울의 제자 '마르클'과, 하울과 악마의 계약을 맺은 불꽃 '캘시퍼', 무대가리 허수아비 등과 얽히고 설키며 소피의 모험이 시작된다.


그냥 적당히 늙은 것도 아니고 아주 폭삭 늙어버렸지만 소피는 절망하지 않는다. 갈 길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미련 없이 살던 곳을 떠난다. 그렇지만 주름진 얼굴과 무거운 몸과 삐걱거리는 무릎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늙는다는 게 이런 건 줄 몰랐다며 저절로 한숨을 내쉰다.

계단을 제대로 오를 수 없어 헉헉거리면서도 소피 할머니는 결코 포기란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일에 대한 책임감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꽃미남 마법사 하울에 대해서도 지극히 담백하다. 비록 실제 나이는 열여덟 살이지만 할머니로 바뀐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외모에 맞는 나이듦의 지혜까지 갖추었기에 잘 생겼지만 철없는 마법사 청년을 한 발짝 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리라.

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감탄했던 것은, 얼굴은 추할 정도로 주름 잡히고 형편없이 몸은 굽었지만 소피 할머니에게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힘과 사이 사이 던지는 말 속에 푹 녹아 있는 현명함이었다.

아이들도 그것을 일찌감치 눈치챘던 모양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부터 꽃미남 마법사에게 폭 빠져버린 아이들이 극장을 나서며 뜻밖의 말을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이 들면 놀랄 것도 없대!" "잃을 것도 없다던데!"

집에 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1941년 생, 예순네 살이니 노년의 초입에 들어서 있다. 만화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라는 생각에 앞서 노년을 알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중년의 내가 '나이 들어 좋은 점'을 손가락 꼽으며 생각하는 동안, 만화영화 속 단 몇 마디의 말에 노년을 거의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더 이상 놀랄 일도, 잃어버릴 것도 없는 나이가 올 것인지 가만 생각하는 동안, 우리 집 컴퓨터 바탕 화면에는 어느 새 꽃미남 하울의 얼굴이 올라와 있다.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재미도 의미도 함께 얻은 우리 가족의 지난 해 마지막 영화였다.

덧붙이는 글 | <하울의 움직이는 성>(Howl's Moving Castle, 2004)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 목소리 출연 : 바이쇼 치에코, 기무라 다쿠야, 미와 아키히로 등)

덧붙이는 글 <하울의 움직이는 성>(Howl's Moving Castle, 2004)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 목소리 출연 : 바이쇼 치에코, 기무라 다쿠야, 미와 아키히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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