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다리 내주고 이룬 코리안드림

이주노동자들의 상처받은 삶

등록 2005.01.05 09:21수정 2005.01.0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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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사카는 공장에서 일하던 중 왼쪽 다리가 철재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사카는 공장에서 일하던 중 왼쪽 다리가 철재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 인권위 김윤섭

사카(30)는 새해 2월 말이 되면 6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고향인 인도네시아 동자바 섬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는 왼쪽 다리에 철제 부목(副木)을 단 장애 12등급의 장애인이다.


지난해 여름 트럭에서 자재를 내리는 작업 중 원판에 왼쪽 다리가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대퇴골 하단부 골절과 근육 파열, 그리고 무릎 관절 개방창 등 무려 다섯 가지 진단이 나온 중상이었다. 다섯 번에 걸쳐 수술을 받았지만 무릎 부상이 깊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지경이 되었다.

부상을 당할 무렵, 그는 미등록노동자(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다행히 사장이 산재로 처리해 주어 장애보상비와 휴업급여를 각각 600여만원씩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장은 산재 처리를 해주며 이해할 수 없는 단서를 달았다. 병원비가 1000만원 이상 나오면 산재보험비를 그에게 줄 수 없다고 했다.

산재 처리를 하러 간 당일, 사장은 창구 직원에게 보상비를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해 달라고 주문했다. 다행히 말귀를 알아들은 사카는 사장 몰래 창구로 되돌아가 자신의 통장 계좌를 적어 주고 나왔다.

"개인적으로 한국이 고맙습니다. 미등록노동자인데도 국가에서 치료해주고 산재 처리도 해주었으니까요. 외국에서는 산재 혜택을 못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한국말 모르는 사람이었거나 센터(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에서 돕지 않았다면 보상도 못 받고 그냥 돌아갔을 겁니다."

통장을 꼭 쥔 그는 정당한 대가를 받았음에도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장애를 입은 육체보다도 그간 보상비를 놓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특히 사장과의 관계를 꽤 의식하는 눈치였다.


사장은 그를 신뢰했다. 한국말에 능하고 성실한 사카는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생산라인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장은 통원치료 중인 그에게 12월 말까지 공장 기숙사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지만 그는 기숙사를 나와 친구의 거처에 몸을 의탁했다.

거처를 옮기기 전 사카는 회사에 퇴직금 240만원을 요구했다. 사장은 귀국행 항공 티켓은 끊어줄 수 있지만 퇴직금은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사카는 현재 노무사에게 퇴직금 수령을 의뢰해 놓은 상태다.


사장과 자신 사이에 쌓인 일말의 신뢰감이 깨지게 된 지금의 상황이 그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귀국을 앞둔 그에게 퇴직금도 상당한 돈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

코리안 드림은 있는가?

미등록노동자라도 산재 환자의 경우 그 치료 기간만큼 비자가 연장돼 사카는 내년 5월까지 한국에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귀국을 서두르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약혼녀는 홍콩에 베이비시터로 4년간 취업했다가 최근 고향에 돌아와 있다.

사카는 8남매의 맏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방용품을 만드는 한국의 현지 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니까 그는 현지 투자법인의 산업연수생 비자로 한국에 온 노동자였다.

현지에서는 월 5만원을 받던 그는 더 많은 임금이 보장되는 산업연수생의 길을 택했다. 그는 야근수당을 보태 월 4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았고 매달 20만원에서 25만원의 돈을 고향에 송금했다. 그러나 1년만에 공장이 문을 닫았다.

사카와 함께 산업연수생으로 온 인도네시아 노동자는 모두 스무 명이었는데 몸이 아픈 두 명만 귀국하고 나머지는 미등록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전자회사에 취직한 그는 월 70만원을 받았다.

더러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살인 같은 야근도 그는 돈 버는 재미로 견딜 수 있었다. 그때 입국한 사람들 중에서 단속을 피하고, 열악한 근무여건을 견디며 지금까지 남은 사람은 사카를 포함해 두 사람뿐이다.

사카는 그간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다. 그 사이 고향에서는 그가 보내준 돈으로 집도 새로 짓고, 동생들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의 희생으로 행복해진 가족들이 새 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그는 말했다.

"왜 집에 가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 다녀오는데 50만원이면 되지만 저 같은 사람이 갔다 오려면 700만원이 듭니다. 브로커를 통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듭니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브로커가 또 월급에서 12만5000원씩 떼어 갑니다. 50만원을 받는 사람이 2년을 꼬박 모아야 빚을 갚을 수 있죠. 연수생은 3년 계약입니다. 3년만 돈 벌어서 꿈을 이루는 노동자는 없습니다. 연수생 계약이 끝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미등록노동자가 되는 건 그 때문이에요."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낡은 차를 두 대 정도 구해서 용달회사를 운영하는 게 꿈이다. 인구가 5000명 정도 되는 고향에는 화물용역차 여섯 대가 운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6년은 오롯이 공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이 정착해야 한다. 이제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라는 딱지는 떼겠지만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그의 앞날을 제약하고 있다.

이 겨울 동안 한푼이라도 덜 쓰면서 퇴직금을 받아내야만 그가 한국에 온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는 한쪽 발을 내주고 코리아 드림을 이루었다.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a 베트남 출신 투안의 집에서 겨울을 나는 이주노동자들. 공장 옆에 달린 방 두칸짜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베트남 출신 투안의 집에서 겨울을 나는 이주노동자들. 공장 옆에 달린 방 두칸짜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 인권위 김윤섭


베트남 하노이 출신 투안(33)은 한국생활 10년째로 주위에서 '큰형'으로 불린다. 실제로 그는 동생들과 조카들을 거느리며 함께 살고 있다.

인천과 시흥시의 경계쯤 되는 농촌마을에 자리잡은 사무용 소파 공장. 공장 옆에 딸린 방 두 칸짜리 허름한 숙소에 도착했을 때 투안의 아내 투이(25)는 방 입구 마당에 설치된 조리대에서 저녁식사로 베트남식 만두 '램'을 프라이팬에 굽고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젊은 청년들이 얼굴을 내보이는데 놀랍게도 모두 여덟 명이나 되었다. 인근의 베트남 동료들이 모처럼 모였는가 싶었으나 모두 함께 사는 식구들이라고 했다. 투안 부부와 함께 조카 2명과 사촌동생 1명이 원래 식구였는데 겨울이 되면서 친구 두 명과 후배 하나가 합류해 살게 되었다.

보일러가 고장난 방은 냉골이었다. 잠을 자는 큰방에는 전기장판이 세 장 깔려 있었고, 온풍기 난로가 방안 공기를 덥히고 있었다. 보일러를 고치려면 50만원이 들기 때문에 올겨울을 난로와 전기장판으로 견디기로 했다고 한다. 그 외에 큰 냉장고와 장롱, 텔레비전, 오디오, 그리고 인터넷이 가능한 컴퓨터를 세간으로 갖추고 있었다.

한편 방 한구석 벽에는 신단이 차려져 있는데 투안이 불교 신자라서 매월 첫날과 보름에 과일을 놓고 불공을 드린다고 했다. 어떤 이주노동자의 숙소보다 안정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많은 식구가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투안이 차려 놓은 식탁에 모두 둥글게 앉았다. 베트남식 램과 채소국이 나왔고, 쌀밥이 곁들여졌다. 소주를 한 잔씩 반주로 주고받는 식사자리라서 그런지 한결같이 얼굴들이 밝아 보였다. 특히 투안은 한국사람 못지않게 우리말을 유창하게 해서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 와 있는 투안의 일가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하남에서 선반공으로 있는 형도 입국한 지 5년이 되었고, 아내 투이의 경우 친정 오빠와 남동생이 시흥과 수원에 각각 산업연수생으로 와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투안의 친구 하나와 후배가 인근 공장의 야간근무조로 출근한다며 숙소를 나섰다.

"그나마 출근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있어요. 식구가 많을 때는 열두 명까지 함께 지냈어요."

이 많은 식구들의 한 달 생활비는 90만원 내외다. 모두 똑같이 분담한다.

투안은 1995년 스물 세 살 나이로 경북 왜관의 섬유회사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 일곱 군데가 넘는 작업장을 옮겨 다니며 그는 오랫동안 미등록노동자의 신분으로 살고 있다.

투안은 그동안 이주노동자들이 겪을 만한 온갖 풍상을 다 겪었다. 가령, 감금상태로 지내다가 탈출했다든가,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었다든가, 장시간 노동과 임금체불을 당했다든가, 산업재해로 손가락 마디를 잃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큰형'이라는 그의 애칭에는 그런 이력도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명절이 되면 투안 부부네 숙소로 베트남 친구들이 50여명씩 모여 잔치를 벌일 정도로 그는 베트남 이주노동자들 사이에 명실상부한 큰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투안은 이 공장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그는 목공 기술자로 120만원의 월급을 받고 있고, 아내 투이는 70만원을 받고 소파에 들어가는 가죽의 재봉질을 돕는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만나 결혼했다. 지난해 딸이 태어났는데 지금 그 아이는 베트남의 가족들이 키우고 있다.

a 경기도 부천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끝내고 맥주로 피로를 풀고 있다.

경기도 부천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끝내고 맥주로 피로를 풀고 있다. ⓒ 인권위 김윤섭


“한국 경제가 좋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공장 사장은 투안을 한국노동자와 똑같이 대한다. 사장이 그렇게 대하니 함께 일하는 여섯 명의 한국 근로자들과도 한 식구처럼 지내고 있다.

"어디 가든 사장이 잘해 줘야 밑의 사람도 함께 잘해 줍니다."

최근에 완제품을 보관하는 창고에 불이 나서 회사가 어려워졌지만 투안은 공장을 떠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걱정은 많다. 한국 경제가 어려워진 데다가 공장마저 전 같지 않아 언제까지 이 식구들이 함께 지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최근 5개월 동안 일이 없어 평일에도 쉬는 날이 한 달에 사나흘씩 되었다. 투안의 친구 하이(海)씨도 용접공인데 20여일째 실업 상태이다.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마땅히 사람을 쓰는 곳을 찾을 수 없다.

"1년 전에는 벼룩시장 보고 전화하면 금방 일자리를 얻었는데 지금은 어렵습니다. 우리도 한국 경제가 빨리 좋아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투안 부부는 내년 연말에 귀국할 예정이다. 그러나 동생, 조카들은 비자 기한이 내년에 끝나지만 돌아갈 계획이 없다. 한국에 입국하는 데 모두 1200만원씩을 빚지고 온 사람들이다. 투안처럼 미등록노동자가 되어 몇 년 더 한국에 머물며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내년 8월이면 출입국관리소에서 대대적인 단속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이주노동자들의 세계에 퍼져 있다.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그전까지 어떻게든 돈을 모아 보려고 애쓰지만 경제가 나빠져서 그도 여의치 않다.

동생 풍꾸이는 돈을 벌어 집에 돌아가면 사장이 될 거라고 했다. 무슨 사장을 할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그때 생각할 거라며 웃었다. 투안에게 한국에 온 목적을 이루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해볼 수 있을 만큼 돈은 모았지요. 그러나 사람을 믿는 마음은 많이 잃었어요."

그는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일을 아내와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a 지난해 겨울 '강제추방반대, 미등록 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한 농성'에 참가했던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 이들은 85일간 성공회 성당에서 농성을 벌였다.

지난해 겨울 '강제추방반대, 미등록 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한 농성'에 참가했던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 이들은 85일간 성공회 성당에서 농성을 벌였다. ⓒ 인권위 김윤섭


아무것도 모른 채 명랑하게 자라는 아이

러시아 출신의 안나(26·가명)는 무희 출신이다. 지금은 없어진 예술흥행비자로 입국해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한국남자를 만나 업소에서 탈출해 아이를 낳았다. 아이 아버지는 지금 현재 수감되어 있는데 내년 봄이나 되어야 출소한다. 그녀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보호를 받으며 돌이 채 안 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안나는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이주노동자다. 남편이 구속되는 바람에 안나는 아직 아이의 출생신고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아이 아버지와는 혼인신고도 안 된 상태로 그녀는 불안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아이 아버지가 출소하면 혼인신고를 하고 2년 후에는 자신도 한국국적을 취득할 생각이지만 아이 아버지가 출소 후에 혼인신고를 해 줄지 확신을 못하고 있다. 당장 아이 아버지가 출소해도 마땅히 함께 살 집도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안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이트클럽에서 탈출한 뒤로 러시아 송출회사와 한국 업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부모가 사는 러시아로도 돌아갈 수 없다. 설령 러시아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고 해도 그녀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 아이가 한국사람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고향의 부모는 안나가 한국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줄 알고 있다. 아이의 사진을 보냈는데 안나 오빠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빼다 박았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안나는 쉼터의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지낸다. 외모가 워낙 눈에 띄기 때문에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 며칠 전 만원을 주고 동네 사진관에서 찍었다며 아이의 사진을 내보인다. 아무것도 모른 채 건강하고 명랑하게 자라는 아이는 안나에게 굴레이자 희망이다.

"한국, 죽겄어요."

한국어가 서툰 안나가 유독 또렷하게 늘어놓는 한국말 푸념이다.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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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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