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시장님에게 '인사'를 빼먹었다고?

김홍준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해촉 논란을 보며

등록 2005.01.06 02:55수정 2005.01.0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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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어느 출판사에 갔을 때다. 마침 추석이 코 앞이었다. 출판사 대표와 직원들이 선물을 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느 직원이 "000 씨에게도 인사해야 되지 않나요?" 하고 물었는데 대표는 잠깐 망설이면서 "글쎄, 그 양반까지 인사해야 되나?"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몇차례 더 '인사'라는 단어를 썼는데 대화 속의 인물이 출판사의 경영에 있어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듯 이내 다른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했다. '인사'. 참으로 미묘한 단어였다. 그들의 대화에서 이 낱말은 '착한 어린이는 공손히 인사하죠' 식의 예절교본 용어는 아니었다. 협객이나 의인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들은 대개 오른손만 쓰면서는 살 수 없고 왼손도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출판사 입장에서도 더러 '인사'는 하면서 사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진짜 사과만 든 사과 상자가 명절에 잘 팔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직 관계라면 사정이 다르다. 윗사람이 누군가의 자리를 낙점해주거나 혹은 그것을 위태롭게 할 때 그 당사자는 '인사' 하러 다녀야 할 처지가 되는데 이렇게 공직 관계의 경우에서 '인사'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부천영화제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과 관련된 논란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보도가 있었거니와 <오마이뉴스>에서도 지난 12월 22일, 김정온 기자의 상세한 보도가 있었다. 처음 보도가 나올 때는 김홍준씨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부천시가 해촉했다고 했는데, 이후 전혀 다른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요컨대 김씨가 이런저런 마찰로 홍건표 부천시장과 껄끄럽게 되었는데도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5일 밤, KBS 2 TV '시사투나잇'의 내용으로, 다름 아닌 부천시 문화예술국장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지난 해 7월 열린 부천영화제에서 김씨가 내빈 소개를 하면서 부천시장의 이름을 까먹었고 폐막식 때는 마이크도 꺼져버린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로 시장이 매우 불쾌해 하던 참인데, 김씨가 영상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인사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화예술국장의 말이다. 화면에는 그 당시 자신이 얼마나 창피했었는가를 공식 석상에서 거푸 토로하는 홍 시장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번 일로 정일성, 이미례, 이춘연 등 영화인 출신의 부천영화제 조직위원들이 사퇴를 했고 박찬욱, 봉준호, 권상우, 이영애, 이병현 등 28명도 올해 부천영화제의 작품 출품이나 참가를 거부하기로 했다고 한다. 특히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지닌 영화인협회의 신우철 회장마저도 “나이든 사람들을 한나라당이라고 하면 나 역시 나이든 사람이지만, 영화제가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반박하며 사퇴했다고 한다.


'인사'라는 단어에서 관료적 권위주의를 본다

이 사안은 지난해 6월 보궐선거로 당선된 홍 시장이 자신의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을 부천시체육회 사무국장,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등으로 발탁한 것과 함께 홍 시장의 불투명 행정 논란의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예의 미묘한 단어, 즉 '인사'라는 낱말에 짙게 배어있는 관료적 권위주의에 시비를 걸고 싶다. 이런 투의 말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잔재, 요컨대 지구가 자기 중심으로 공전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검은 소파의 퀴퀴한 냄새를 맡는다.

이를테면 지난 2001년 10월 26일에는 경복궁 복원의 백미로 꼽히는 흥례문 낙성식이 열렸는데 누가 뭐래도 그날의 주인공은 우리 시대의 최고의 대목장이자 경복궁 복원에 10년을 바친 무형문화재 제 74호 신응수 도편수이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낙성식 당일, 그는 그야말로 변변한 '인사' 한번 제대로 못 받고 함께 일했던 목수들과 함께 다른 자리에서 씁쓸히 술잔을 기울였다. 수많은 정치인과 관료 등이 앞다퉈 무대를 차지하고 나섰으니 우리 시대의 명장은 10년 고락을 함께 한 목수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이번 논란 역시 같은 맥락이다. 혹시 홍 시장의 속셈에는 영화제가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영화제는 시민들과 영화인이 함께 부르는 합창이요, 축제라는 점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김씨가 집행위원장으로서 어떻게 업무를 해왔는가 하는 점은 그 주인공인 시민들과 영화인들이 꼼꼼하게 따질 문제인데 그 공과를 자치단체장에 대한 '인사'나 '결례' 따위로 문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안하무인 격으로 '아랫 것' 다루듯 하는 관료가 있다는 것은 매우 씁쓸한 풍경이다. 동시에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 사회는 좀더 진보해야 하며 어느 철학자의 아포리즘처럼 '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해준다. 아직 우리는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양대 임지현 교수가 줄기차게 문제 삼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내면적 파시즘이나 일상의 파시즘은 정치와 제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감수성, 의례, 태도, 예의 등에 걸쳐 짙은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있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진보, 일상의 진보, 앤서니 기든스가 언급한 바대로 '감정 민주주의'의 고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새로운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안이다.

왜 우리는 행사 때마다 국회의원들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치사를 들어야만 하는가, 왜 뒷짐을 선 채 고개를 뻣뻣히 제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인사해야 하는가, 명함에 힘깨나 주는 사람들은 왜 검은색 소파에서 당최 일어날 줄 모르는가, 왜 그들은 왼손으로 뒷짐을 쥐고 오른손만 건성으로 내밀어 불쾌한 악수를 청하는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2002년 6월, 서울시장 선거 유세가 한참이었는데, 월드컵 때문에 경기장을 돌아다닌 죄를 면하고자 아내의 여름 옷을 사기 위해 한밤에 동대문시장에 갔다. 옷가지를 사고, 새벽 1시 쯤이던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로 나서는 순간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이 갑자기 길을 막았다. 나는 내가 중대한 과실을 했나 싶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경호원들은 계속 차를 막고 있었다. 나가서 물어보았다.

영화제가 관료주의에 침해 당해서는 안될 터

그들의 대답인즉 '아무개 후보께서 잠시 후에 이 건널목을 건너가실' 예정이란다.

오호통재라, 그러셨구나. 시장도 아니고 까짓 후보에 불과한 사람이 잠시 후에 이 건널목으로 행차를 하시는구나, 그래서 차량도 별로 없는 곳에서 차를 막고 서있는구나,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불쾌했다. 도대체 이따위 권위주의를 위하여 내가 그토록 담배를 피워대며 세금을 냈단 말인가.

김씨의 집행위원장직 해촉에 관하여 또다른 배경이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 문제들이 불거진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검토해볼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도 할 줄 모르는 산하 단체장에 대한 '꽤심죄' 차원의 문제가 결코 미미한 사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업무 실적 평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더욱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소한 인격적 마찰에 따른 찰과상도 아니다. 이건 우리 시대 내면의 낡은 표정이다. 김씨가 업무 수행 능력이 어떠한지 그 공과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권위적 관료주의에 대하여 '인사'하러 가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부천영화제의 조직위원직을 사퇴한 영화인이나 이 영화제와 관련하여 출품 또는 출연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한 영화인들을 지지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시민과 영화인의 축제가 권위적 관료주의에 침략 당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번에 분명히 확인시켜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적 상품을 내거는 것이 유행이 된 이 때에 그 지역의 문화예술인이 단체장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이번에 증명해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자율적 내면과 독립적 행정을 양 날개로 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단체장에게 '인사'를 하고 다녀야만 하는 이 괴이하고 전근대적이며 해괴망칙하고 고약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권위주의 문화가 한 줌의 재로 어서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을 지지한다. '4열 종대로 헤쳐 모여' 따위는 추억의 명화 속에서나 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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