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20회(4부 : 캠퍼스 연가 1)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1.12 10:58수정 2005.01.1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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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사랑일기 5


사랑할 때는
술 없이도 취할 수 있고

사랑할 때는
하루에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다


사랑일기 6

늦겨울과 새봄의 교차로
목젖까지 메마른 온 산야를
용솟듯 태우는 불길처럼
지금 내 몸과 마음도
뜨거운 홍염에 휩싸여 있습니다

당신 아니고는 그 누구도
절대로 끌 수 없는
아, 사랑의 불길



우리는 과제가 있는 날이거나 시험기간에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보고서의 부족한 점도 서로 지적해 주고 시험 정보도 서로 교환했다. 가끔씩 전망 좋은 휴게실 창가에 서서, 창 너머로 지나가는 학생들을 구경하는 등 캠퍼스의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도 만끽했다.

공부를 하다가 무료하거나 정말 짜증이 날 때면 말없이 일어나 가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미술학과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야트막한 동산. 단풍나무, 소나무, 능금나무, 모과나무 등 몇몇 수종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채 터를 잡고 있는 그 곳은 비교적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거기에도 그녀의 하숙집 앞에 서있는 것처럼 라일락 몇 그루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그 라일락 그늘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아 경치 구경을 했다. 눈에 닿는 오른쪽은 온천장들이 우뚝 솟은 번화가였고, 왼쪽은 푸르름으로 물결치는 논밭이었다. 우리는 주로 그 푸른 논밭을 내려다보며 눈의 피로를 풀었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콧노래를 불렀다. 반주가 필요하다 싶으면 그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녀와 함께 동산 아래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개울을 건너, 논 가운데 위치한 마을의 내 자취방에 가서 기타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둘이서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불렀기 때문에 굳이 장르를 가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로 발라드 계통을 즐겨 불렀다.

사랑하는 사람아 나의 말 좀 들어 보렴 두 눈을 꼭 감고 나의 말 좀 들어 보렴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고 믿어주고 궂은 일 슬픈 일들을 우리 나눠 가지자 모진 풍 파 헤치고 달 속의 전설을 생각하면서 우리 사랑하는 맘 변치 말고 믿어보자

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있어요 그 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 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 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eve in yesterday. Suddenly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Oh yesterday came Suddenly. Why she had to go I don't know, she wouldn't say. I said something wrong now I long for yesterday. yesterday, 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Now I need a place to hide away Oh I believe in yesterday.(지난날 나의 모든 시름은 멀리 사라져버린 것 같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나는 지난날을 믿어요. 갑자기 내가 전의 내가 아니고 내 위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었어요. 오 지난날이 갑자기 내게 왔어요. 왜 그녀가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녀가 말하려 하지 않은 것을 나는 모릅니다. 나는 무언가 잘못 이야기했어요. 이제 지나 간 날을 그리워할 따름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쉬운 게임이었는데 이제 어디론가 도망갈 곳이 필요해요. 오 나는 지난날을 믿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주로 물기 있는 노래를 즐겨 부른 것 같다. 노랫말이 좋고 분위기 있는 노래라서 많이 불렀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때 왜 좀더 밝고 명랑한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컸다. 시국이 어두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3년 후의 슬픔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대학 1학년 첫 학기가 꿈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한철이 녀석이 학기 초부터 우리 과 여학생 하나만 소개시켜달라고 조르는 것을 계속 안 된다고 했더니 그 즈음 와서는 조르다 못해 아주 성화였다. 너는 여자가 많지 않으냐는 말에 그래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며 어떻게 여학생 하나만 소개시켜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철민아, 높은 자리 있을 때 좀 잘 봐줘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너는 참 좋겠다. 나비처럼 매일 꽃밭에서 공부하구. 우리 체육과는 여학생도 거의 없지만 설사 있다고 해도 이렇게 우람한‥‥‥ 야 말도 말아, 무서워서 접근도 못한다야.

아, 참 나도 이런 줄 알았으면 어문계열로 진로를 택하는 건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선택 했어‥‥‥ 철민아, 정말 재미가 없어서 학교 못 다니겠다. 야, 어떻게 하나 안 되겠냐?"

그것을 보다 못한 노진이 한 마디 했다.

"야 메뚜기, 그렇게 궁하면 네가 직접 조달하면 되잖아. 너의 진짜 전공이 그거 아녔어?"

"뭐야 임마, 이 자식이 나를 놀리고 있어?"

"왜 나한테는 소개시켜 달라는 말 안 하냐? 우리 과에도 소수지만 여학생은 있는데?"

"됐다. 너희 과 여학생은 줘도 안 갖는다. 맨날 심장이 어떻구 간장이 어떻구, 콩 팥과 십이지장은 이런 기능을 하구요, 해부학 시간에 어쩌구 저쩌구‥‥‥ 완전히 사람을 환자 취급하더라구. 야야 밥맛없어."

"너 그러고 보니, 이미 의대 다니는 여학생과도 연애해 봤구나?"

내가 그렇게 되물었다.

"말이 그렇게 되나.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내가 어느 과 여학생하고는 연애를 안 해봤겠냐? 법대, 이과대, 공대, 농대 다 해봤다야."

"나도 짐작은 했지만 메뚜기 너, 정말 소문대로 바람둥이구나."
이번에는 노진이 응수했다.

"야, 같은 표현이라도 기왕이면 연애박사라구 해주라. 바람둥이가 뭐냐. 차라리 플레이보이라고 부르든지. 그건 그렇고 하여간 내가 여러 여자들을 겪어 보니까, 그래도 여자는 역시 문과대가 최고더라."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야?"

이번에도 노진이 되물었다.

"공대 여학생들은 선머슴아 같고 이과대 여자애들은 왜 그렇게 뻣뻣하냐? 그리고 법대, 의대 여자들은 똑똑한 척 해서 싫고, 그래도 문과대 여학생이 얼굴도 예쁘고 패션 감각도 있고 말도 나긋나긋하게 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도 있는 것 같고 거기에 센스까지 갖춰… 뭐 여자답다고 할까? 여성스럽다고 할까?"

"야, 너 정말 연구 많이 했다. 이미 박사의 경지를 뛰어 넘었다. 뛰어 넘었어! 아주 여성학으로 전공을 바꾸지 그래."

노진이 그렇게 말하자

"야, 정말 그런 과도 있냐? 어느 대학에 있는데?"

한철이 이렇게 되묻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못해요, 무슨 말을‥‥‥"

"야 철민아, 어떻게 안되겠냐? 이렇게 무릎 꿇고 빌게, 야 그리고 잘되면 내가 정말 크게 한 턱 낼게."

한철이 빌다시피 얘기했지만,

"글쎄, 아무리 그래 봐도 나는 못해. 다른데 가서 알아봐."

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노진이 나를 거들었다.

"그럼 문과대 여자들을 상대로 메뚜기 네가 직접 꼬시면 되겠네?"

"야, 소도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고 그래도 철민이가 살짝 다리를 놔주면 훨씬 일이 수월하지. 여자 꼬시는 게 뭐 그렇게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줄 아냐? 너도 한번 해봐. 그렇게 쉬운 일인가."

"야 철민아, 그냥 거짓말이래도 해주겠다고 해라. 이 메뚜기 녀석 더 이상은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

노진이 그렇게 중재를 했다. 나도 한철이 하도 귀찮게 굴어 일단 그 자리를 피해볼 요량으로 한번 심각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한철에게 여학생을 함부로 소개시켜주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21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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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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